1. 자! 새롭게 출발해요 수술만은 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수술만은 하지 않을 거야.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수술만은 하지 않을 거야! 허공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며 병실 문을 박차고 뛰어 나왔지만 마땅히 위로받을 곳이 없다. 항문을 폐쇄하고 인공 항문을 달 수밖에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그 말이 계속 집요한 환청으로 따라왔다. 49년간 한번도 병원이라고는 가보지도 않은 나인데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강 집사. 89년 3월. 아랫배가 아프고, 혈변을 보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시작한 두 달 동안의 각종 검사를 통해 내려진 결론은 항문을 폐쇄해야 하는 직장암 말기. 남들에게나 들려지는 이야기로나 알았던 암이 내 속에서, 내 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다니...... 수술을 해보자는 의사의 결정에 암이란 단어조차도 없을 어딘가로 무작정 달려가 꼭꼭 숨고 싶었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왔나......? 이제껏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보니 지나온 날들 모두가 좀더 잘 살아 보겠다고 물질만을 위해 뛰어온 인생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잘 산다고 인정을 받기 위해 뒤를 돌아볼 생각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뛰어왔다. 이제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것임을......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다. 그렇지만 하나님, 나에게 이번, 한 번만 기회를 허락해 주실 수 없습니까?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점점 마취의 혼미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인공항문을 달아야 한다고 했는데 항문이 그대로 있다는 것으로도 상태는 어떻든 간에 마냥 행복했다. 퇴원후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이것까지 행복해 하고 감사해야 한다고 수없이 다짐했다. 그래서 두려움을 억누르며 저항도 없이 그저 자신의 몸을 뚫고 지나갈 방사선 앞에 자신을 던져 주었다. 숨을 크게 쉬고 싶어도 혹시나 깊은 숨을 쉬면 방사선이 잘못 쪼여질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온 몸이 까맣게 죽어가던 6주간을 두려움 반, 기대 반 속에 보냈다. 까맣게 타들어가던 몸이 살아날 때, 이제는 사는가 싶어 모든 것에 고맙고 감사했다. 하나님께도, 의사 선생님께도, 모든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그리고 숨을 쉴 수 있다는 것과 마음 놓고 힘을 주어 변을 볼 수 있다는 것에도 진정 감사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또 다시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번에는 전이된 신장을 제거하고 또 장을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이된 곳이 하도 어렵고 힘든 곳이기에 그냥 통증을 조절하고 삶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온 집안이 벌집을 건드려 놓은 양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미국에 있는 형제들은 이왕 마지막이라면 미국으로 와서 치료해 보자고 종용했다. 미국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이 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은 이국 땅에서 수술은 진행되었다. 발견된 종양들은 너무나 수술 장소가 어렵고 힘들어 생명이 위험한 곳, 신장과 등뼈 사이에 종양이 발견되었다. 오 나의 주여, 내가 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은 아시지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하나님이 살려주시든지 아니면 주의 뜻대로 하시든지. 다만 얼마나 오랜 통곡으로 주님을 바라보게 하셨는지요... 우리는 강 집사님이 미국으로 떠나실 때 또 다시 뵙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개나리,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온 동네와 산하를 뒤덮었을 때 집사님은 우리 곁으로 돌아 오셨다. 얼마후 수술 후유증이 나타났다. 임파종으로 인해 부어오른 다리 때문에 완전히 거동을 할 수 없었고 순간 순간 찾아오는 공포와 고통이 그를 짓눌렀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을 생각할 때도 주님은 집사님을 다시 만나 주셨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놀라지 말라. 나는 내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장 10절) 이제는 포기해야 하나, 이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했는데도 하나님은 집사님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다. 어느날 담당 의사 선생님은 희열에 차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치료하셨어요,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셨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지요. 나도 당신이 믿는 하나님과 친해지고 싶습니다. 축하합니다!” 오늘, 강 집사님은 비록 6개월에 한번씩 몸속에 삽입된 호스를 새것으로 교체해야 되지만 자신처럼 고통 중에 있는 환자를 위해 우리와 함께 호스피스 자원 봉사자로 일하고 계신다. 집사님의 오랜 투병 생활을 통해 가장 능력있는 산 증인으로서 봉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의 삶을 새롭게 감사함으로 받아주신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전하며 외친다. 자! 우리 모두 새롭게 출발해요. 주님이 바로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그냥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왜냐하면 주님이 당신을, 당신보다 더욱 사랑하시고 계시기에 슬픔도, 절망도, 고통도 주님께 맡기면 분명코 주님이 맡아 주십니다. 아멘! 2. 얼음물 좀 드리세요 1996년, 이른 봄. 이제, 육신을 잠재울 두 세평 남직한 충청남도 산골의 무덤 사이를 빠져나오며, 영구차 차창으로 흘러가는 봄빛 머금은 나무들과 함께, 후일에 아름다운 천국에서 멋지게 기쁨으로 만나자고 돌아서는데, 가물었던 대지에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를 듣는다. 벌써 2년반 전, 난소에 암이 발병하여 힘들어 한다는 한 자매를 소개받았다. 두 아들의 어머니, 그리고 너무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랑하는 남편의 아내, 큰 아이는 청소년 국가대표 아이스하키 선수로, 작은 아이는 중등부 아이스하키 선수로 그 둘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부부는 할 수 있는 한 사랑하며 열심히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우리가 찾아 갔을 때 그녀는 아들 둘의 경기 사진과 장식장에 가득한 트로피를 자랑스럽게 설명하며 자신의 질병도 잊는 듯 싶었다. 그러나 이내 느껴지는 통증이 그녀를 순간 무너뜨리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다. 흘러내리는 고통의 눈물 속에서 자매는 운동선수인 아들들을 위해서도 자신은 어떻게든 존재해야 한다고 절규한다. 주님! 우리가 어떻게 이 자매를 섬기며 도와줄 수 있습니까? 자매는 아픈 몸을 이끌고 아들들의 연습장과 경기장을 찾는다. 얼마나 자주 찾아 갔는지 이미 자매의 지정석이 정해져 있다. 그리고 나서 또 통증 때문에 며칠을 병원의 신세를 져야 했다. 자매를 만나고 거의 반년이 지나갈 무렵 상태가 좋아졌다. 우리는 이렇게 상태가 좋아져서 자매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원했다. 상태가 몹시도 좋아진 자매에 대해 안심하고 있을 즈음,고통스런 신음 소리와 함께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제 정밀검사의 결과가 나왔는데... 하며 울먹이는 소리 뒤에, 전신에 퍼져버린 암세포를 다시 찾아내게 되었단다.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떻게 해야 돼요? 재촉하며 물어 오지만 우린들 어떤 방법이 있으랴! 병이 나은 줄 알고 그렇게 좋아했는데... 나의 마음 속에 자매의 큰 눈망울이 전화 수화기와 어우러져 난감할 뿐이다. 다시 자매의 집을 방문했다. 친정 어머니의 낙심과 통곡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갈망했다. 또 기나긴 새로운 투병을 시작해야 될텐데 어떻게 하지...... 이젠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맡겨 드리고 평안을 가져 보자고 시편 3편의 다윗의 고백을 전하고, 기도할 때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자매와 그 가족들도 눈물로 이렇게 고백했다. “지금껏 내놓지 못했던 자신을 주님 앞에 아픈 마음으로 드리고 나니 왠지 평안해져요. 왜 진작 이런 평온을 맛보지 못했는지 뒤를 돌아보니 참 아쉬워요.” 자매와 남편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너무도 평범하면서 감사함으로 투병할 수 있다고...... 올 겨울은 나에게 유난스럽게 무척이나 추웠다. 너무도 고통 받는 많은 환자 앞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능한 나를 보면서...... 그 날도 그랬다. 6인실 병실에 드러 누워 있는 자매의 배 속에 전이되고 퍼진 암세포는, 이제는 더 이상 부풀어 오를 데가 없어 등 뒤로까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녀가 덮고 있는 시트는 몽고인의 텐트인 양 솟아오른 배를 중심으로 나락처럼 내려 뜨려져 있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고향을 찾아 분주히 떠나던 96년도 구정날. 떠날 수 없는 자들이 모여 있는 병실에 그들이 찾아가지 못하는 고향 대신에 나라도 대신 찾아 가서 저들과 고향을 이야기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을 향해 나섰다. 종로 5가에서 혜화동의 그 분주함이 아닌 낯설기까지한 한산한 길거리로 들어섰다. 구정날 찾아간 나를 보던 자매는 졸다가 깜짝 놀라 그 큰 눈을 껌벅거리며 놀라한다. 금방 꿈속에서 보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찾아왔느냐는 것이다. 자매를 휠체어에 어렵사리 앉히고 병원의 데이트를 시작했다. 앞으로 다가올 우리의 고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너무도 평안하고 아름다운 자매의 본향 집과 나의 본향 집을 기대하며, 몇 시간을 똑같은 코스지만 병원 복도를 휠체어와 함께 걷고 걸었다. 얼었던 내 손으로 자매의 부풀어 오른 배와 등을 쓸어 주니 너무나 시원하단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다더니 자매는 얼음물을 생각했나 보다. 간병하시는 친정 노모를 졸라서 얼음물을 한 잔 마시겠단다. 그러나 자매는 마음으로는 꿀꺽 꿀꺽 시원스럽게 마실 것 같던 찬 얼음물이지만 어떤 물도, 음식도 목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넘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요행히 입가심을 하고 수 십번의 시도를 통해 조금이라도 위속에 다다르기만 하면, 난소로부터 전이되어 위와 복부 전부를 점령해버린 암세포가 속에서 거부를 하는지 구토와 함께 끊어질 것 같은 창자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자매는 최대한 용기를 내어 물컵을 받아들고 코에 걸린 산소 호흡기의 줄을 걷어 내고 한 모금을 입안에 들이 마시는 듯하더니 금방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도하기를 수 차례. 다행스럽게도 입안에 남아있던 얼음물을 아주 조금 삼킬 수 있었다. “주여! 이 자매에게 마지막이 될 이 한 모금의 시원한 얼음물을 넘길 수 있게 하여 주소서.” 기도하고 있는 나를 향해, “엄마! 이렇게 맛있는 얼음물 좀 목사님 드리세요. 어서요, 이렇게 맛있는 얼음물을...” 재촉하며 내미는 얼음물을 받아 들었지만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에 얼음물 한 모금도 넘길 수가 없었다. 96년 3월 14일 오후 8시. “목사님 좀 불러 주세요!” 한 마디를 하고는 혼수상태에 들어갔다고 한다. 급히 차를 몰아 병실에 도착해 보니 자매는 가장 편안한 숨을 쉬고 있었다. 남편과 아들들과 모두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고, 천국에서 다시 기다리겠다고 그날이 올 때까지 주님 안에서 만나자고, 그리고, 그 다음날 시합을 하는 아들의 우승을 위해 기도한다고 한 그 밤, 11시 25분 모두가 믿음생활 잘하겠다는 남편과 아들의 약속과, 후일에 다시 만나자며 먼저 잘 가라고 마지막 우리의 인사를 들으며, 찬송 소리와 함께 본향을 향해 가셨다. 나에게 건네 주었던 얼음물 담았던 컵을 머리 맡에 남겨놓고...... 장례식 중에 벌어진 둘째의 시합은,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잘 인내하여 승리를 거둔 엄마처럼 우승컵을 엄마에게 드릴 수 있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장 7절 - 10절) 3. 두 번의 실패 속에 찾아온 평안 언젠가 박물관 전시실에서 보았던 미이라 같았다. 언제부터 켜졌는지 뿌연한 불빛 아래 야윌 대로 야위어버린 그녀의 몸은 먹물을 칠한 듯 검고, 검은 형상으로 겨우 겨우 내어 쉬는 숨이 있기에 살아 있을 뿐이었다. 송 집사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기에 첫번째 결혼이 실패로 끝이 나버렸다. 심성이 고와서 동네 사람 모두가 그녀를 칭찬한다. 실패로 끝나버린 그녀의 결혼을 안타까와 하던 주변 사람의 소개로 믿음이 좋다는 한 형제를 만나 재혼을 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시간들이 흘렀다. 행복이 그렇게 가까이에서 그녀를 반겨줌에 감사가 아무리 넘쳐도 부족했다. 믿음이 좋다던 남편은 자신이 봉사하고 있는 주일학교 봉사를 함께 하자고 요청했고 남편의 그 말이 고맙고 감사해 송 집사는 주일학교 봉사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남편에게서 이해 안되는 부분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자꾸만 주변의 믿음의 형제들에게 사업을 확장한다고 사업자금을 빌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어 부부가 함께 착한 일을 하자고 자주 말하였다. 남편은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에게 돈을 요구하고, 급기야는 그녀의 친정 식구 모두에게 필요를 채워 줄 것을 요구했다. 남편의 사업자금의 필요가 급증할수록 그녀가 누리던 행복은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 버리고 말았고,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는 남편의 사업자금을 대는 한 심부름꾼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었다. 계획이 되었던가? 남편은 온다 간다 말이 없더니 며칠이 지나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는 미국에 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도 미국으로 와야 한다는 것이다. “아!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을까!” 송 집사는 주체할 수 없는 고통에 혀를 깨물며 주님 앞에 엎드렸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합니까?” 수많은 눈물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였다. 그러나 빗발치는 남편의 성화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와 고통에 그녀는 공항의 한 모퉁이 전화박스에서 자신이 알고 있던 채무자에게 용서를 빌고, 후일 자신이 그많은 고통까지도 다 변제하겠다고 약속하고 눈물로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낯설은 미국땅에 도착하고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마중 나온 남편은 당연한 일을 한 듯 태연해 했고 또 옆에 함께 마중 나온 2명의 어린 아이는 자신의 아들이란다. 기구한 삶이 시작되었다. 갖은 눈치와 수모 속에 이민 생활 아닌 이민 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어느 한 구석 마음을 붙일 자리가 없었다. 다만 그녀에게 밟히는 것은 남편으로부터 많은 물질의 손해를 당하고도 “사위도 자식이니께” 하시며 애써 아픔을 달래던 고국에 있는 친정의 가족들 뿐. 그녀가 어렵게 교회를 찾아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하는 기도는 차라리 절규였다.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소서, 거두소서.” 이러한 외침이 그녀가 할 수 있는 간구의 전부였다. 어느 날인가 숨이 막힐 것 같은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어렵게 교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보험증을 만들어 병원을 찾아갔다. 간에서부터 시작한 암세포는 폐와 위를 점령하고 이미 그녀의 온몸에 퍼져 있었다. 차라리 그것이 심 집사에게는 위로가 되었고 평안이 되었다. 선고된 생명의 시간은 3개월 미만이었다. 의사 선생님과 교우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고향을 찾아 귀국하여 누구도 찾아오기 힘든 요양원으로 후송되었다 어두컴컴한 병원의 복도를 지나니 그녀의 병실이 나왔다. 복수로 솟아오른 그녀의 배 위로 파르르 떨리는 숨결... 통증의 고통을 참기에는 너무도 연약한 야윔만 남아 있었다. 송 집사님! 나 박목사요! 들을 수 있어도, 들을 수 없어도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숨 한 번도 마음놓고 쉴 수 없는 자매를 위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간구 드릴 수밖에... 그 고통의 외마디 속에서 기도를 마쳤을 때 “아멘!” 이라고 분명한 고백을 하신다. 힘들여 얼마 후면 천국에 갈 것을 확신시켜 준다. 그렇게 몇날이 지나 완전히 혼수상태가 왔다. 급히 온 연락을 듣고 달려가는 새벽길 병원이 왜 그리 멀던지... 임종을 지키기 위해 달려가는 마음이 조급하다. 병실에 도착해 자매의 영혼을 받아 주시길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나서 1분 정도가 되었나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영혼을 영원한 안식에 평안으로 부르시고, 길지 않은 육체의 삶을 한줌의 재로 남기게 허락하셨다. 1994년 3월. 시리도록 아픈 허망함 속에서... 4. 어느 늦깎이 병상세례 다 빠져버려 번들거리는 머리, 퀭한 두 눈에 걸터앉은 돋보기 안경이 왜 그렇게 아프게 보일까. 앙상하게 마른 두 팔을 쭈욱 뻗어 보지만 굽혀진 팔 마디에 파르르 떨리는 아픔이 있다. 이 아픔 속에서 70세에 받는 병상세례이기에 더욱 눈물로 감사하며 할렐루야!를 외치신다. 이 긴 세월 동안 김 수억 어른을 두려워 하지 않는 친척이나 가족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어른은 언제나 당신이 정하신 표준대로 살기를 강요했고, 또 자신도 희생하셨다. 이 어른의 고향은 이북이었다. 전쟁통에 남하할 땐 금방 고향으로 돌아 갈 것이라 믿었다. 동생과 잠깐 난리를 피하다 가려니 했다. 그러나 길이 막혀 버렸다. 그의 남은 인생은 그리움으로 인해 애타고 애타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호스피스 모임에서 L집사님이 위암 환자인 이 어른을 소개한다. 성격이 너무 강한데다 통증도 심하고 어느 누구도 이 환자에게 접근할 수가 없다. 자녀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하나 없다. 그러나 이 외삼촌의 영혼에 대해 안타까와 하는 조카가 있다. 하나님은 그에게 사랑을 주셨고 기도를 주셨으니 우리에게 섬겨 봄이 어떠하냐고..한 영혼을 버리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는 병원을 찾아 갔다. 신촌에 있는 Y병원을 찾아가는 차안에서 핸들을 잡고서 동행하시는 주님께 오늘 만나야 되는 그 환자에 대해 주님이 먼저 만나 주시길 간구하고 또 간구했다. 심호흡을 깊이 하고 비장한 무장으로 우리의 만남의 길을 허락하실 줄 믿고 병실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순간의 긴장이 찾아왔다. 거절당할 것과 쫓겨날 때를 대비해서 모든 임전 태세를 갖추었는데, 몇 마디의 문병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환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는가! 그토록 강팍하다던 사람에게서 이렇게 쉽게......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병실에 도착하기 30분 전부터 잠깐 졸았는데 비몽사몽간에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고 지금 놀라 “내가 어찌하여야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하고 계시는 중에 우리를 만났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렇게 우리의 만남을 시작하게 하셨고, 김 수억 어른은 늦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고, 용서받고, 모든 아픔들과 고통에서 화해되어 돌아 오게 되셨다. 병원에서 마지막 항암 치료를 마치시고 집으로 퇴원하게 되었을 때 문제가 생겼다. 병원에서는 우리의 출입을 환영하던 부인이 왠지 180도 태도를 바꾸어 집으로 방문하는 우리를 막무가내로 거절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니 도저히 포기할 수 없어서 수차례의 섭섭한 박대도 감수하고 환자의 집을 찾아 갔다. 처음에는 자신을 문병하러 찾아온 우리를 거절하는 부인의 눈치를 보던 환자가 이제 병상 세례를 받고 싶다는 소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세례가 베풀어지고 성찬예식을 할 때, 어른께서는 신앙고백과 함께 부인을 불러 호통을 치신다. “내가 세례를 받는데 축하해 주지는 못할 망정 싫은 기색을 하다니. 내가 이제 하나님을 믿으니 이제 당신도 딴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하오”라고 말씀하신다. 간단하지만 강하게 예수님을 소개하며 예수님을 모르는 부인을 향해 안타까워 하는 김 수억 어른을 보았다. 세례를 받으신 지 3일 후, 96년 7월 26일. 김 수억 어른은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는 말씀을 하시며 아주 평안함 가운데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시고 고통과 괴로움과 섭섭함으로부터 이제 자유자가 되셨다. 장례 절차를 논의할 때 가족들은 불교의식을 원했다. 임종전에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르라고 하신 유언이 어렵지 않게 주변의 모든 반대자들을 잠재우고 기독교식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장례는 교회 많은 성도들의 참여로, 늦깎이로 세례를 받았지만 참 은혜 중에 마쳤다. 장례가 끝난 후 아들을 위시한 유가족들이 한 장의 편지를 들고 왔다. 그들에게는 생전 첫 걸음인 교회를 찾아 왔다. “...중략... 아버님의 세례와 장례를 통해서 교회와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됨을 감사합니다. ...중략...” 고 김 수억 어른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 마지막까지 주님을 증거하고 가족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포기하시지 아니하시는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화해하시는 사랑을 전해주시는 열매를 남기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 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린도후서 4장 16절-18절) 5. 개선장군처럼 그는 완전한 승리자였다. 우리를 청주 톨게이트까지 바래다주는 그의 차창에 비친 뒷모습, 가끔 한 번씩 터져나오는 기침, 들썩거리는 그의 어깨선이 연약해 보였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개선장군의 입성처럼 당당해 보였다. 공식적으로 진단을 받기는 간암에서 폐암으로 전이된 시한부 4개월의 생명. 두 살 된 딸이 있는 32세 된 형제를 부탁하고 싶다는 그의 사촌누나가 전화를 했다. 물론 예수님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단다. 형제를 소개 받을 때 왠일인지 몇 년전 돌보던 완전한 무의식 속에 있던 한 형제가 생각난다. 5년전, 우리가 호스피스를 처음 시작할 때 식물인간이 된 시한부 인생의 형제. 그 형제도 32세였다. 또 두 살 된 딸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찾아 갔을 때는 그 형제의 부인은 없었다. 떠날 수밖에 없음을 미안해 하는 쪽지 한 장을 놓아 두고 딸과 함께 집을 떠난 뒤였다. 얼마 동안 그 형제의 가족들과 함께 식물인간인 형제를 돌보았다. 배설물이 밖으로 나온 지 너무 오래 되어 욕창이 된 엉덩이의 상처. 묘한 냄새를 풍기던 형제의 고통 속에서도, 사고가 나고 식물인간이 된 지 2년 반 만에 우리의 섬김을 통해 처음 일어나 앉아 볼 수 있게 하셨던 우리 하나님의 사랑의 돌보심이 그 형제를 기억나게 했나 보다. 우리가 돌보며 섬기던 1년 여의 시간 후, 그를 하나님의 품으로 돌려 보낼 때 장례식장 뒷편 멀리서 눈물 짓던 한 여인과 품에 안긴 아이를 보았다. 갑자기 밀려드는 형제에 대한 진한 애정을 갖고 그가 입원해 있는 S병원에 들어 섰다. 6인실의 병실에 들어 서면서 창문 곁에 깊은 시름에 잠겨 두려움과 무엇인지 모를 불안에 싸여 초조해 하는 형제를 발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형제는 불안해 하기는 했지만 너무나 깨끗하였고, 해맑아 보였다. 그저 안타까웠다. 자신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섭고 떨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재앙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장래 소망을 주시려는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징계를 하시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서 고난과 고통과 죽음을 맞게 하시고 내가 받을 죄악의 징계와 고난과 고통과 두려움을, 죽음을 다 해결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죽으신 지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첫 말씀이 우리에게 평안이 있으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으면 형제의 고난과 고통도, 연약함도, 질고도, 질병도 다 해결이 됩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형제에게 나음을 입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의 권세를 받아 모든 허물에서 깨끗함을 받았으니 두려울 게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시길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했으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모든 약속을 다 성취하셨음을 믿고 모든 것을 다 맡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빌립보서 4장 6절,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형제의 모든 질병과 고통에서도 부활의 권세를 갖고 평강이 있을지어다!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믿음을 가지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 증거를 갖고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을 나의 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을 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 하나님을 형제 안에 거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 성령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서 도우실 뿐아니라 형제를 지키시는 분이요 모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96년 6월 4일. 이 형제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된 엄청난 신분으로 바뀌었다. 형제의 표정과 마음은 평안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찼고, 자신을 주님이 찾으셨음을 감사하였다. 그리고 형제는 치료 불가 판정 4개월의 시한부를 넘기면서 두려움의 고통 가운데, 불확신의 실패 가운데서 자신을 소망으로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을 표시했다. 이제는 사망의 두려움이 아닌 부활의 큰 능력을 소유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승리자가 되었다. 함께 예배하고 돌아오는 고속도로의 상큿함이 개선가를 부르게 한다. 형제는 96년 10월 7일 새벽 5시에 갑자기 어지럽다 하더니 병원에 이송되었다. 한참을 누워 있더니 갑자기 일어나 무릎을 꿇고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작은 소리나마 힘차게 찬송을 부르더니 그렇게 하나님께로 행진을 시작했다. 그 형제를 장례한 다음날 형제가 이땅에 탄생시킨 또 한 아들을 그는 천국에서 보리라. 6. 장 집사님의 때 늦은 3중주 오늘도 승용차를 운전하는 남편의 옆 모습을 보며 문득 스쳐가는 전율이 있다. 어쩔 뻔했나!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극심한 고통이나 외로움과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겠지... 자동차에 몸을 싣고 남편과 함께 외딴 시골 미자립 교회 간증 집회로 떠나는 발걸음의 한걸음마다 주님에 대한 감사의 고백을 드린다. 장 집사님에게는 아름다운 꿈이 있었단다. 그녀는 대학 때 첼로를 전공한 연주가였다. 그래서 큰 딸에게는 피아노를, 작은 딸에게는 바이올린을 공부시키고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온 가족이 연주를 하며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것이 꿈이었다. 올 봄에 들어와 조금씩 아랫배가 예사롭지 않게 아파왔다. 혹시 맹장염이면 어쩌나 하고 병원에 검사를 받기 위해 입원했다. 주치의를 만나고 나와 병실에 들른 남편은 대수롭지 않는 얼굴로 대했지만 언뜻 스치는 불안이 있었다. 간단하게 수술을 하잔다. 굳이 캐어 묻기도 그래서 그냥 그냥 시간이 지나가 퇴원하기를 원했다. 답답한 병실이 싫어서 잠깐 밖의 바람을 쐬기 위해 병원 중앙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걸어 갔다. 우연히 바로 앞에 서 있는 주치의와 마주쳤다. 주치의는 집사님을 보자마자 자신의 연구실로 들어 가자면서 먼저 앞선다. 방안에 들어 가면서 벽에 붙어 있는 환자의 장 사진을 설명할 때 무언가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맹장염이겠거니 생각했던 자신의 질병이 악성 직장암이라니... 항문을 폐쇄하고 옆구리에 인조 항문을 만들어야 겨우 2년,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6개월의 시한부 생명. 항문을 폐쇄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고 해도 진행된 암의 위치가 아랫부분에서 7cm밖에 되지 않아 잘못하면 그나마 수술 중에 즉사할 수도 있다는 어려움을 통보한다. 어떻게 병실로 돌아 왔는지, 돌아 오는 길에 그렇게 많은 생각이 지나 갔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데... 좋은 목소리와 젊음을 가지고 주님께 드려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꿈꾸던 하나님께 드릴 3중주 연주회는? 큰 사위를 들이고 얼마나 자랑스러웠는데... 수많이 흘러가는 생각의 꼬리를 붙들고 정리를 시작했다. 그래 이왕 죽을 바에야 하나님께 떼를 써보리라. 수술을 급히 받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를 무지하리만치 거절하고 퇴원을 해버렸다. 퇴원하는 길로 곧바로 거의 매일 찾아가던 집 뒷산의 기도하던 장소로 찾아 갔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렇게 수술한다면 감당할 수 없었다. 주님! 날 위해 십자가 지시길 주저 않으시고, 날 위해 채찍 맞으시기 위해 두려워 하시지 않으시던 주님 날 도와 주소서! 주님만이 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믿습니다. 지금 죽는다 해도 하나님 나라 가는 것은 확실하여 두렵지 않지만 지금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버리면 그동안 날 위해 계획하셨던 주님의 계획과 훈련이 수포로 돌아 가지 않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손해가 아니십니까? 잠깐 사는 이 세상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니 마음이 아픕니다. 주님에게 올려 드리지 못한 연주회를 드릴 기회를 주시길 위해 떼를 쓸 때 조금의 평안이 왔다. 집으로 돌아와 마음을 정하고 평안을 누리려고 감사의 찬송을 드릴 때 승리케 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느낄 수 있었다. 오직 내 안에 사신 분이 주님인 것을 고백하며... 교구 담당 목사님이 명단을 들고 찾아오셨다. 믿음으로 자신의 직장암을 치료하겠다는 장집사님을 소개하시면서 박 목사님이 꼭 심방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호기심도 났다. 암에 대해 두려움보다는 정복한 것 같은 한 여인!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해 보겠다는 믿음은 이해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같이 간 호스피스 집사님과 2시간이 넘게 간절히 설득하였다. 마침내 장 집사님은 자신 속에 깊이 숨어 있던 두려움을 토하고 눈물을 쏟아 놓으시더니 치료에 응해 보시기로 결정하셨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좋으신 하나님. 전에 어떤 정보지를 통해서 알아 두었기에 외국의 어느 병원으로 바로 연결해 드릴 수 있었다. 수속은 일사천리로 빠른 속도로 처리되어 그 다음 주에 병원에 다시 입원하였다. 소식이 없어 불안한 염려가 있을 때마다 주님께 간구했다. 한달 여만에 다시 돌아 오신 집사님은 강건하실 뿐만 아니라 그 때는 환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질병과 싸워 이긴 믿음의 한 여인은 위대한 믿음의 승리를 일구어 내었다. 그리고 3중주는 아닐지라도 남편과 약속한 미자립교회로 한 달에 한 번씩 자비량으로 간증집회를 떠난다. 다시 기회를 주신 주님께 삶의 십일조를 드리기 위해... 이번 주일 예배 후에 만난 집사님이 “목사님 다음 주에는 다른 시골 교회로 집회 가서 뵐 수 없을 것 같아요!” 인사하시는 집사님의 뒷 모습에서 부활하신 환희의 십자가를 주신 주님과 동행함을 바라보고 또 한번 이 사역의 감사를 돌린다. 그리고 축원한다. “집사님! 속히 3 중주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세요. 그리고 그때에 관객으로 우리 모두를 초청해 주세요.”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146편 1절-5절) 7. 아빠, 또 병원 가? “따르릉...” “목사님, 저의 동생이 뇌종양인데 어떻게 하면 좋죠? 좀 도와 주세요!” 유달리 자신이 부모처럼 돌보던 동생이었다, 95년 12월, 목근육이 뭉치고 두통이 심하여 병원에 갔을 때는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믿었다. 새로 시작한 사업으로 스트레스가 많아 병원의 진단처럼 “긴장성 두통”이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치료의 효과보다는 더욱 심해지는 두통 때문에 왠지 모를 불안감으로 항상 마음을 조려왔다. 애써 불안을 떨치고 96년 5월 10일에 찍은 MRI에 나타난 결과는 너무나,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비인강 암 3기” 코뼈 뒤, 뇌 바로 밑으로 2개의 암종양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3-4cm, 다른 하나는 조금 작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결과는 끔직하게도 시한부 생명이라고...... 급하게 입원을 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전화를 한 것이다. 형제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들렀다. 여느 환자들처럼 병색이 완연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꼬리표로 붙은 3기 암환자, 시한부 생명의 공포와 두려움이 없었다면 그는 너무 건강해 보이는 형제였다. 그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간병을 하는, 소녀같이 여리디 여린 부인은 인사 뒤 눈망울에 어느새 눈물이 달렸다. 시려오는 가슴을 추스리며 형제와 투병을 위해 믿음을 갖자고 권면을 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장 1절).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와도 나의 질병, 나의 고통을 위해 채찍에 상하시고 피흘리신 예수님을 오늘 내가 믿을 때 넉넉히 투병할 힘을 주신다고 함께 기도했다. 처음 반신반의하던 형제는, 서서히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온 긴 시간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요, 살아 계셔서 지금 이 시간도 자신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으로 부르길 원했다. 그리고 형제는 한번, 두번 심방을 할 때마다 믿음의 투병을 시작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공포가 찾아오고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형제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33년 동안 꿈꾸던 꿈이 산산이 부셔져 파도와 같이 흘러 또 흘러 가나 했는데...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달리심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이때까지 느껴 보지도 못한 평안이 오기 시작했고,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음성을 믿고 자신의 모든 투병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게 되었다. 한 달에 두 번씩하는 방사선 치료는 머리카락을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다 빼버리고, 방사선이 쪼여지는 부분이 새까맣게 타버려도 그래도 살 소망을 주신 주님 때문에 하루 하루를 견딜 수 있었다. 그나마 오늘 하루를 주신 그것으로 감사했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계시는 주님은 형제에게 평안을 주셨고, 3차 검사가 진행될 때는 50:50의 확신을 갖게 하셨다. 지난 10월 13일 주일. “목사님 제가 할 일이 없을까요? 제가 호스피스를 위해 사용되었으면 좋겠네요. 어제 CT 촬영을 했는데 머리 속에 있던 모든 종양이 다 없어졌대요, 정말 하나님이 저를 치료하셨다구요.” 쏟아 놓는 그의 간증을 들으며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100% 믿어요. CT를 찍기 전 바로 옆 침대에 있던 환우가 너무 너무 고통스러워 하며 죽어가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어느 환자는 무슨 버섯을 치료제라고 1,000만 원어치 먹었다고 자랑하는데 나는 여지껏 그럴 만한 돈도 벌지 못하고 무얼 했나, 나는 이대로 끝일까? 많은 고통과 의심을 갖고 삶을 포기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가족들과 믿음의 식구들과 호스피스와 함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 다시 주님이 평안을 주셨고 확신을 주셨어요. 이제 나의 생명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어요. 이 일에 제가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형제의 간증을 듣는 나의 마음에 가을 하늘 높이 파란 물이 흠뻑 적셔옴을 만끽하며, 아빠가 산책이라도 나갈라 치면 세살 된 딸애가 “아빠, 또 병원 가? 잘 다녀 오세요.” 하던 인사가 바뀌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우리의 고백을 하나님께 드린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것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 33장 2절-3절). 그리고 형제는 지금 열심히 남자 호스피스 팀에서 사역을 하며 자신에게 주어지는 열매의 기쁨을 맛보며 하나님 앞에 더욱 더 감사해 한다. 8. 마지막 그리고 영원한 예물 10년 전부터 시름시름 앓아 왔다. 그러다 4년 전부터는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소라는 학교도 포기하고 병원의 침대가 자기 침대인지, 자기 방의 장미꽃 한 다발이 조각된 연한 핑크 빛 헤드 싱글 침대가 자기 침대인지 분간할 수 없이 자주 입,퇴원을 반복했다. 소라는 까무잡잡한 그러면서도 눈망울은 초롱초롱한 18세의 소녀이지만, 10년의 투병이 몸을 자라지 못하게 해서 겨우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왜소한 몸을 지녔다. 3년 전, S아동병원에 입원한 아들을 간병하던 한 보호자가 병명도 모르는 고통에 시달리던 한 어린 아이(?)를 우리 호스피스에 소개를 했다. 너무나 왜소하고 말라 있어 어린 아이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대지를 쓴 펄벅 여사와 같은 작가가 꿈이라는 15세의 당찬 소녀는 자기의 모든 병력과 증상에 대해 또, 자기가 먹는 약들의 종류에 대해 한참이나 조잘거리며 성남의 골목을 물어 물어 찾아간 나를 향해 작가가 되어 수다를 떤다. 소라는 작가의 꿈을 안고 하루에도 몇 편씩 마음 속의 글을 쓰며 산다. 현대 의학도 규명하지 못한 불치의 병. 하루에도 몇 번씩 뒤틀리는 뱃속에서의 통증과 살갗에 돋는 쐐기가 쏘는 아픔 때문에 금방 몸을 동그랗게 궁글리고 온 얼굴에 땀만 흘릴 뿐이다. 소라의 엄마는 어느 길 거리에서 구두를 닦는다. 그러기에 엄마가 아침에 눈물과 미어지는 답답함으로 챙겨 놓고 나간 점심을 혼자서 겨우 일어나 한 숟갈 뜨는 것이 자신을 돌보는 전부였다. 소라를 앞에 놓고 예수님의 친절과 사랑을 함께 이야기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이 소라를 위해 우리를 보내셨다고 했더니 얼마나 놀라던지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2000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 목사님에게 찾아 오셔서 말씀하셨느냐고 순 거짓말이라고 박박 우기더니 이내 눈물을 그 동그란 눈에 가득 담고 예수님이 자기를 찾아 오셨음을 감사했다. 혼자 있는 소라를 위해 일주일 단위로 조를 짜고 매일 여자 호스피스 집사님들이 낮에 방문했다. 소라에게 밥을 챙겨 주고 친구가 되어 주었다. 소라를 한번 만나더니 자신의 친딸 이상으로 염려하고 챙기시던 남자 호스피스 박집사님은 밤에 집으로 또 병원으로 찾아간다. 소라는 자신이 공주같이 되었다고 흥분하며, 찬송 배우기를 너무나 좋아한다. 찬송가 487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는 소라의 애창곡이 되었다. 너무나 영특한 아이. 아무리 통증이 와도 성경을 꼭 끼고 찬송하는 폼이 너무 은혜스러워 “너 전도사님 같다!”라는 격려를 해 주고 또 더 많은 찬사를 해 주고 싶은 아이. 한참 ‘성덕 바우만’ 형제의 골수 이식 문제로 떠들썩하던 때였는데 이 문제가 우리 공주에게 영향을 주었던지, 어느날 병원에서 자신을 도와주시던 간병인에게 “혹시 나를 하나님이 지금 데려가시면 어떻게 하지?” 하고 걱정하더라는 것이다. 성한 곳이라고는 대문짝 만한 이빨밖에 없어 골수 기증도 할 수 없고 , 자기의 모든 장기는 다 망가졌으니 이빨밖에 기증할 것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침대에 누워 있을 때도 몸을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다루며 무엇인가 감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왜 그럴까? 궁금은 했으나 워낙 아픈 육신의 고통을 잘 참아내는 아이라서 아마도 자신의 통증을 조절하는 방법이겠거니 생각했다. 97년 2월 12일, 03시 50분. 급히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급히 달려왔건만 소라는 벌써 싸늘한 채로 평안한 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병원에 도착하기 전, 끙끙 앓기만 하던 소라가 간병인에게 죄짐 맡은 우리 구주를 불러달라 하면서 몸을 뒤척이더니 밤색의 가죽 지갑을 하나 꺼내 놓고 “목사님에게 전해 주세요, 헌금이에요!” 하더란다. 나에게 건네준 지갑을 열어본 순간 말로 다 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천 원권 13만 6천원과 오천 원권 2매, 만 원권 1매, 십만 원 수표 한장을 언제부터 모았는지 이십 오만 육천 원과 중국 화폐 5각자리 한 장, 미국 1달러 한 장, 필리핀 5피소 한 장이 다리미로 다린 듯 구겨진 데 한 곳 없이 고이 고이 지갑 속에 담겨 있었다. 간병해 주시던 집사님은 그 내용물을 보시고 “그래서 통증이 올 때 몸을 뒤척이다 깜짝놀라 몸을 반듯이 눕고 무엇인가를 손으로 쓸었구나!” 말씀하시며 눈물 짓는다. 누군가 문병하러 와서 주고 가는 용돈을 쓰지않고 믿음의 예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소라는 그렇게 정성을 드렸구나 생각을 하니 소라의 고통 속에 드려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애절하며 확신에 찬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먼저 떠나면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요!” 환하게 웃던 유난히 희고 넓은 이빨을 갖고 있던 소라. 마지막으로 엄마는 예쁜 드레스를 입히고 싶단다. “그래요, 우리 소라에게 예쁜 드레스를 입혀서 보냅시다!” 동이 터오르고 옷 가게가 문을 여는 시간을 기다리며 죄짐 맡은 주님이 입히신 소라의 빛나는 하얀 드레스 입은 천사를 바라본다. “엄마, 나 위해 교회에 나가 열심히 기도해!”라고 부탁하던 소라의 약속을 살기 바빠 잘 못 지켰다고 후회하며 이제라도 열심히 소라를 보는 듯 교회에 나가겠다고 약속하는 소라 엄마. 그에게 마지막 그리고 영원히 드린 예물을 꼭 소라의 뜻에 맞게 전달하겠다고 인사하고 돌아서는 내 귀에 소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언젠가 자신의 성경책과 크레용 등을 윗층에 사는 아이에게 필요할 것 같아 주었다고 담대히 말하던 음성이 들린다.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에게 자신의 예물이 아름다운 열매가 되게 하라고... 화장장에서 만난 소라의 아빠에게 딸의 소원을 전해 주었다. 소라의 소원이 아빠를 언젠가 천국에서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해 주니 그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꼈다. “어떻게 해야만 내가 우리 딸 소라를 만날 수 있습니까? 나는 소라에게 너무나 큰 빚을 졌어요!” 소라의 간절한 소원이 아빠의 고백을 통해 이루어지는 시간이었다. 9. 기적은 자유를 선포하고 “기적은 순수한 동기와 순수한 믿음에서 역사하는가 봐요? 오늘 내가 기적을 바라지 말고, 내가 기적이 되어 보세요.” 환한 미소로 이 기적을 배달하는 문 자매. 그러나 본인의 손가락은 거꾸로 구부러지고, 다리는 어그러져 똑바른 걸음을 걸을 수도 없는 류마치스 관절염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환자 사정은 같은 환자가 안다면서 질질 다리를 끌며, 류마치스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드러 누워 계시는 노인 환자를 찾아 오늘도 심방을 따라 나선다. 89년 5월. 대학에서 응용 미술을 전공했으나 아직 마르지 않는 공부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 교육학을 공부하기 위해 떠난, 미국 땅의 생활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자매에게 찾아온 뼈저린 외로움은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게 만들었고, 외로움은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했지만 외로움의 고통을 씻어 주진 못했다.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심적인 고통과 육적인 고통을 주었고 뼈가 쑤시고, 관절이 아픈 증상이 이때부터 자매에게 또 하나의 고통으로 더해졌다. 그렇지만 이제 두 살반 된 딸, 보라를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이겨 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별 것 아니겠거니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매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상상을 초월 했다. 자꾸만 손가락은 뒤로 젖혀지기 시작했고, 온 몸은 터질 것처럼 아파왔다. 다리는 걸음을 거부했다. 이 고통 속에선 더구나 외국에서 하룬들 견딜 수 없어서 귀국을 결심했다. 수없이 흘려보낸 눈물의 고통이 고국에 돌아 왔건만 끝나질 않았다.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없는 자신을 환영해 줄 누구도 없었다. 살아있다는 것이 그렇게도 짐스러울 수가 없었다. 차라리, 차라리... 수도 없이 모진 마음도 먹어 보았지만 그때마다 딸 보라가 그녀의 눈에 밟혔다. 차도는 없었으나 그나마 자신을 거둬주던 이들의 경멸에 아픈 마음을 안고, 91년 다시금 미국행 비행기를 타 보았지만, 남편마저 그녀를 포기하고 돌아서 버린 냉냉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할 수 없이 피눈물을 가슴에 안고 다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기는 여덟 살이 된 보라가 한사코 엄마와 동행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처음 문 자매를 만났을 때, 그는 더 이상 손가락이 뒤로 넘어 가지 못하게 온 손가락에 수 십개의 링을 끼고 있었다. 벨을 눌러 놓고 한참이나 기다리다 사람이 없나 보다고 막 돌아 서려는데 누군가 인기척을 내며 방문을 열어 주는데, 두평 남짓한 방을 걸어 오는 것조차 힘겨운 듯 보였다. 종잇장처럼 말라버린 육신은 누군가 옆에서 조금만 크게 말을 해도 그 진동으로 온몸이 빠개지는 것처럼 아팠다. 얇은 홋이불 한 장도 들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완전한 무기력이었다. 초등학교 2년인 딸이 돌보아 주니 영양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그럴지라도 학교를 다녀온 보라는 얼마나 명랑하던지... 이러한 문 자매 앞에서는 아무 것도 도움이 안된다는 자책이 아프게 마음을 두들겼다. 자매와 우리의 교제는 지속되었다. 육신 뿐아니라 사람에게서 받은 깊은 상처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그녀의 심령에 예수님을 의지하도록 전하고, 그분만이 자매의 영육을 치료할 수 있다고 전했다.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지만 모든 상처와 아픔을 치료하신다고 약속하신 사랑의 예수님을 문자매는 만나길 간절히 소원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문제와 질병까지도 주님께 맡겼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을 위에서부터 끌어 잡아 당기는 듯한 체험과 함께 주님은 그녀를 찾아 오셨다. 자매는 이제 자유인이 되었다. 질병의 고통과 약물 남용에서 오는 고통에서도, 미움과 분노와 증오에서도 자매는 자유자가 되었다. 그리고 장래에 대한 염려나 불안에서도 자매는 자유자가 되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이 자유가 있기에 그녀는 오늘 자신의 처지보다 조금 못한 환자에게 찾아갈 힘을 얻는다. 그리고 자신을 치료하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을 나누며 위로한다. 문 자매를 치료하신 하나님이 바로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요, 피할 바위시요, 건지실 자이시기에. 98년 6월 8일, 다시 남편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떠나는 자매를 위해 우리는 축복한다. 이젠 더 이상 자매를 슬프게 하는 일이 일어나질 않기를 ... 그리고 완전한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 10. 왜 나는 밥을 안 주는지 몰라 하얀 피부, 티없이 깨끗한 32세의 나이보다 어리디 어리게 보이는 여인. 침대에 파묻혀 드러 누운 왕방울만한 퀭한 눈이 눈물을 머금고 고통을 호소한다. 6남매 중 큰 딸이면서 항상 몸이 약해 결혼을 미루다 동생들에게 순서를 양보하고, 조카들의 재롱에 만족(?)해야 했던 정미 자매. 공교롭게도, 지금은 오류동에 살지만 우리 교회 옆에 있는 아파트에서 10년을 살았단다. 자매의 가정은 아버지가 불공으로 태어난 아들이라 하여 감히 누구도 이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당연히 불교의 가정인 양 그렇게 인정하고 살아왔다. 우리가 자매를 만나게 된 것은, 병원에 입원한 환자 중에서 예수님의 복음에 방치된 자들을 섬기고, 그들을 예수님 안에서 소망으로 투병할 수 있도록 도와 주길 위해 몇 개의 병원을 선정하여 우리 호스피스 봉사자들이 섬기는 중에 만나게 된 것이다. 자신은 난소암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 있는 너무나 안타까운 자매. 모든 장이 다 막혀서, 배는 불러 오지만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어 식사 때만 되면 “왜 나는 밥을 안 주나?” 계속되는 질문에 다른 환자의 음식 먹는 것을 볼 수 없도록 침대 주변에 커튼을 치고, 오직 링겔로 버티지만 그러나 언제인가 조금만 기력이 회복되면 장을 뚫는 수술을 받아 자기도 먹을 수 있을 거라는 한가닥 희망을 갖고 있는 자매. 첫 번째 만남은 깊은 잠을 자고 있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두 번, 세 번 찾아 갔으나 별로 환영 받는 자리가 아니었다. 다만 병원생활의 무료함과 친절히 대해 주는 우리 호스피스 봉사자들이 좋아서 만나 줄 뿐이었다. 예수님 안에서 투병하면 소망이 있고, 평안이 있다고 전해도 믿을 수가 없다는 한마디로 일축할 뿐이었다. 그러나 봉사자가 만나서 전해 주는 위로와 찬송과 말씀이 어느 날부터인가 자매에게 기다려지는 음식이 되었다. 허기진 육신의 질고 가운데 채워지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흡족한 배부름이 되었다. 이 배부름은 자매의 불안을 점점 씻어주었고, 자매에게 고통에서 점점 예수님을 찾아 십자가를 바라보고 고통을 이겨내게 했다. 그리고, 하루라도 호스피스 봉사자 집사님들이 들려주시는 위로와 복음을 듣지 못하면 그녀는 더욱 배고픔을 호소하는 젖먹이 어린애가 되었다. 전에는 없었던 눈물이 자매에게 자꾸만 많아질 때, 호스피스 봉사자 집사님들의 눈에도 눈물이 많아졌다. 집사님들은 그 눈물을 닦아 줄 때 “우리 예수님만이 이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거야. 그러기에 어렵고 힘들 때 혼자가 아니라 항상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찾아야 돼!”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딸의 옆에서 간병하시던 부모님, 특히 자매의 아버님이 관심이 많아 지셨다. 처음에는 자리를 피하시던 분이 언제부터인가 자매를 위로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전할 때 그 옆에 앉아 계시더니 이제는 자신의 딸에게 관심을 보여 주는 우리 집사님들에게 감사의 말씀도, 오히려 위로를 잊지 아니하신다. 함께 봉사하시는 집사님이 분담을 요청하신다. 한 사람은 자매를, 또 한사람은 부모님을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었다. 낙심하시던 부모님이 이제는 위로를 받고 평안을 누리기 위해 기도를 부탁하신다. 자매의 형제들도 병원에 들를 때마다 우리의 안부를 묻고, 변화되는 분위기에 적응을 한다. 환자를 위한 목요일 호스피스 기도회와 보고회가 있었다. 이 보고를 받는 나의 가슴은 뛰고 감격스러웠다. 보고회 마지막에 집사님들이 봉사하시는 교회의 목사님을 만나고 싶고 또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을 요청한단다. 내친김에 우리는 기도회를 마친 후 곧바로 병원을 향했다. 침대에 힘없이 누워 있던 자매. 우리 집사님이 “호스피스 담당 박 목사님이세요!” 하는 소리에 용수철 튀듯이 일어나 앉으려다 온 몸에 꽂혀 있는 여러 줄들에 방해를 받고 꼬꾸라지는 자매를 붙잡고 모두가 그를 위해 뜨거운 기도를 드린다. 그의 생명을 연장하시고 오늘을 주신 주님이 이 자매와 가족들을 구원하시고 주님이 되셨음을 감사하고, 모든 고통 가운데서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갖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그때 자매의 어머님은 이번 주일부터 모두가 집사님들의 교회에는 갈 수 없지만 병원에 있는 교회에 나가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도 함께 목사님이 계시는 교회에 나오시겠다 하신다. 감격적인 만남을 뒤로 하고 2일이 지났다. 자매의 상태가 이상하단다. 기도하다 우리는 자매에게 병상에서라도 세례를 베풀기로 작정하고 모든 채비를 갖추어 병원으로 향했다. 자매는 눈에 눈물이 가득하여 우리를 반긴다. 배는 부를 대로 불러 있으나 입에는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세례를 준비하고 자매에게 문답을 할 때, 언제 자매에게 이런 확신이 서 있었나 모두가 감격을 한다. 자신의 소망을 분명하게 예수님에 두고 있고 이제는 모든 것에 감사할 뿐, 두렵거나, 슬프거나, 의심이나, 염려가 없단다. 부모님도, 형제들도 고개를 끄떡거려 응원을 하신다. 병상 세례를 베풀고, 함께 한 집사님들과 자매와 성찬을 하며 자매가 먹은 포도즙과 조각이지만 성찬떡이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세례 때 찍은 사진도 전달할 겸 이틀 후에 찾아간 우리는 자매가 천연덕스럽게 침대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음에 놀라고, 온 식구들의 기뻐함에 감사하고, 아주 잘 나온 사진에 감격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주님이 부르시는 그 시간까지 이렇게 평화스러웠으면 좋겠다고 자매와 기도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97년 6월 하순의 장마비 뒤에 오는 뜨거운 태양빛도 무덥게 느껴지지 않았다. 11. 한 사람과의 이별, 아홉 사람과의 만남 저무는 ’92년을 아쉬워하듯 겨울비가 내리던 12월 6일. 주일예배 준비로 분주한 남자 교역자실에서는 9명의 가족들이 뜨거운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그날 막 우리 교회에 등록하여 환영과 위로를 함께 받고 있는 얼굴들은 단단한 각오와 안도감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91년 6월 호스피스팀에 한 형제의 명단이 넘어왔다. 이름: 이 승재(29세), 병명: 육종암이 폐, 오른쪽 다리, 뇌, 위에 전이되었음. 신앙 상태: 아직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며 결혼한 지 1년 되었음. 상상은 했으나 처음 찾아 갔을 때 그의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밀랍인형처럼 창백했다. 머리카락은 한 올도 남아있지 않았고 표정없는 눈만 퀭하니 우리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매주 반복되는 심방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고 그 말씀을 부여 잡았다. 나중에는 다리가 너무 부어올라 그 다리의 무게 때문에 속의 뼈가 저절로 부러졌다. 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찬송하는 믿음을 보여 주었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고름의 썩는 악취 속에서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고, 병상에서 세례를 받았다. 어느날 심방을 끝내고 일어서는데 내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목사님, 내일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날이에요.” 결혼 2주년 기념일이었다. 마지막이 될 그들의 결혼기념일을 위해 호스피스팀 식구들은 케익과 선물을 준비하고, 반입이 금지된 꽃바구니를 넉넉한 옷자락 속에 숨겨 가지고 들어가 작은 파티를 열었다. 같은 병실의 환자들도 눈물로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12월 1일 저녁 7시. 그는 세상을 떠났다. 선물로 받은 성경을 혼수상태가 되기까지 손에서 놓지 않은 채, 온 가족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원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12. 양의 문 병색이 짙으나 건장하신 72세의 어른에게 병상세례를 베풀고 병원을 나섰을 때 세상은 어두워져 있었다. 그분은 너무도 확실하게 “예수님은 나의 구주가 되심을 확실히 믿습니다. 아멘” 하고 고백하셨다. “주여 ! 나같은 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이런 감격을 누리게 하십니까!” 감사와 환희 속에 나의 마음은 밝은 빛으로 찬송이 저절로 넘쳐 나온다. 의사를 지원하다 결국은 전자 공학자가 되어 너무도 열심을 내어 세상을 살다 보니 출근은 있었으나 퇴근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 결과 크게 인정도 받았고, 안정도 찾았고, 또 사업도 괜찮았다. 1983년 8월 14일. 다 늦게 유학이란 미명하에 삶을 바꾸었다. 이민자의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해볼 수 있는 일이란 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결국은 공부를 포기해야 되는 절망 가운데 모든 것을 실패한 실패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실패로 어느 날부터 속에서 피비린 냄새가 나는가 싶더니 하루에도 몇 차례 하혈했다. 장에서 쏟아지는 피가 내 몸 속에 그렇게 많이 저장되어 있었던가? 수 십일 동안 그치지 않는 하혈로 거의 죽음의 문턱에 섰던가 보다. 푸른 초장에 예수님께서 비몽사몽간 이사야 41장 10절로 기도하실 때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치료를 받았다. 이민생활 중 하루 한 시간 늦은 시간대에 방영하는 고국의 방송은 큰 의미를 준다. 어느 날인가 방영되는 프로그램 “심장병 어린이의 실태와 그 어린이를 구합시다!”를 보고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가슴을 쥐어 짜며, 뛸 수가 없어, 숨을 헐떡이며 파래진 입술에 고통을 토하는 저 어린 생명들... 누군가 저들을 어떻게든 도와 주어야 할 텐데... 주님! 제가 저들을 도울 수 있는 어떤 길이 없을까요? 할 수만 있다면 저들을 도와줄 수 있게 저에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였다. 우리의 큰 기쁨과 소망 가운데 딸 아이가 태어났다. 들떠있는 우리에게 병원에선 퇴원을 시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장에 어떤 이상이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가슴을 쥐어짤 내 딸, 숨을 헐떡거릴 내 딸, 입술이 파래지고 웅크리고 다른 아이들과 뛸 수 없는 아이. 그 아이가 내 딸아이라니...아이를 안고 있는 팔과 다리는 떨리고, 완전히 탈진이 되어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아이를 앉고 돌아온 산모와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아이를 안고 눈물로 나를 살려주신 그 분을 찾고 부르짖기를 몇 시간, 하나님의 평안과 온 방안을 너무도 환하게 밝히는 밝은 빛이 우리의 기도하는 손을 통해 아이의 심장에 내려 쪼일 때, 주님은 우리의 딸을 완전히 치료하시고 세계적인 의사들의 결론을 무색케 하셨다. 어린이 심장병 등으로 고통 당하는 자들의 고통을 무료 병원을 세워서 조금이라도 도와 주는 것이 나의 큰 기도 제목이었다. 이 제목을 위해 열심으로 사업을 일구었다. 어느날 주님은 내게 “혼자 이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속한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라”는 응답과 함께 사역의 길로 부르셨다. 부르시는 첫날, 병원에서 포기한 갑상선을 앓는 자매를 주님이 치료해 주셨다. 수많은 환자들이 주님께 간구함으로 회복됨을 체험했다. 환자에 대해 나는 빚진 자로 그 아픔을 느끼게 되었다. 호스피스 사역을 우리 교회를 통해 시작한 것은 1992년 2월 1일. 우리는 환자를 찾아 자원 봉사자와 함께 어느 날은 가정으로, 어느 날은 병원으로 심방을 간다. 심방을 하며 우리는 감사와 기쁨을 누리지만 반면에 아픔과 안타까움을 갖는다. 아직도 고통 가운데 방치된 채 자신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 줄 모르는 너무나 무지한 영혼을 바라 볼 때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장 7절-10절) 13. 검정 비닐 봉투와 팩 우유 8명의 환자들로 꽉 찬 병실에 저녁밥이 들어오고 있었다. 병문안 온 사람들이 침대마다 몇 명씩 무릎을 붙이고 앉아서 서로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저녁밥을 먹을 준비를 하는 부산함은 분명 병실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김 영순 씨의 침대를 머뭇거리며 찾아 갔을 때, 환자는 보이지 않고, 환자 앞으로 나온 저녁밥 식판과 보호자인 듯 싶은 늙수그레한 한 부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검정 비닐 봉투에 무엇인가를 잔뜩 담아 손에 쥔 채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사랑의 교회에서 온 박 목사입니다.” 인사를 하니 황급히 일어나며, 자기도 환자를 기다리고 있단다. 이내 환자는 다른 침대에 실려서 병실로 들어온다. 눈도 뜰 형편이 못되나 보다. 겨우 겨우 고개를 들고, 몸을 빼고, 자기의 침대로 옮겨 갈 때 병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잠시 소리를 죽이더니 이내 일상적인 식당과 같은 북적거리는 분위기로 되돌아 간다. 환자의 고통도, 괴로움도 그 속에 파묻혀 버린다. 보호자 같던 부인은 환자가 살고 있는 비닐 하우스 옆동의 아주머니였다. 며칠전 환자가 병원으로 실려 가는 것을 보고 너무도 딱하여 찾아와 본단 것이 이렇게 늦었다고 말을 하며 정신차리고 힘내라고 위로한다. 그리고 부시럭, 부시럭 검정 비닐 봉투를 끌러 마시라고 내미는 것이 있었다. 가게에서 팔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팩으로 된 우유를 다 수집해 오셨나 보다. 우유를 꺼내면서 그 부인은 환자를 생각하며 넋두리를 한다. “그 놈의 인간은 지금 어디서 무얼 헌디야! 마누라도 새끼들도 돌아보지 않고, 지 한 몸 어디서 건사허면 다 뒨디야. 아이고 불쌍혀라...... 마셔, 그냥 다른 생각 말고 마셔, 쭉! 이것이라도 마시고 힘내야 혀, 그리야 새끼들 데리고 살지......” 환자는 심한 당뇨로 인해 참으로 많은 후유증을 앓고 있다. 눈도 백내장 수술을 받았지만 제대로 시력이 나오질 않아 잘 보이지가 않는다. 이제는 신장이 다 망가져서 배설할 수 없어 온 몸이 풍선에 바람을 불어 놓은 듯 부어 있다. 막 혈액 투석을 5시간 동안 끝내고 들어온 환자는 초주검이 되어 있다. 환자에게, 그리고 사양하는 나에게 쥐어주는 우유팩은 상황에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우유팩을 통해 흐르는 찡한 전율은 내 발걸음을 묶고 그의 한 마디씩 눈물로 뱉어 놓는 한탄을 듣게 했다. 이로부터 시작한 한탄과 투병이 우리에는 벌써 6개월이 지나간다. 결혼 후 딸 아들을 다섯이나 낳고 살 때는 아름다운 꿈도 꾸었단다. 그러나 어느날 한바탕 벌어진 싸움 끝에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진 남편은 몇 년이 지나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다만 소문으로 어디 멀리에서 산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생활 대책이 없던 김 영순 씨는 어떤 분의 주선으로 기도원 골방에서 몇 년을 지내다가 지병을 안고 서울에 올라왔다. 큰 딸은 부모님의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삶을 거부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집을 떠난 지 몇 년이 지났다. 둘째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술을 배운다고 기숙사로 거처를 옮긴 지 반년이 지나간다. 셋째 고2, 넷째 중3, 다섯째 중1이 남았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97년 1월 18일 이후에 자기들이 무엇인가 끓여 먹는다고는 하지만 여의치 못하여 학교에서 영양실조로 자꾸만 쓰러진단다. 무엇으로 어떻게 이들을 섬길 것인가? 호스피스들의 매주 목요일 모임과 기도회에서 우리는 먼저 환자에게 의료 보험증을 만들어 주기로 하고 호스피스로 섬기는 집사님이 전적으로 동사무소 등과 협력을 가질 수 있도록 제반 서류를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2종 보험증을 환자에게 전해 줄 수 있었지만 아직도 본인이 내야 하는 병원비 때문에 보험증을 1종으로 바꿀 수 있도록 주선하고 있다. 한 주에 한 두 번 찾아가는 우리의 섬김 속에 그의 한탄과 저주는 이제 감사로 바뀌고 있고, 왜곡되고 원망스럽던 예수님이 이제는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시기에 자신의 아이들을 맡아 주실 것을 믿게 되고, 맡길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나마도 몇 년간 등을 붙여 살게 하던 비닐 하우스가 이번에 또 뜯겨 나간다고 눈물로 고통을 호소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한탄과 원망만 아니고 기도를 부탁한다. 에미가 이렇게 병원에 있어 꼼짝을 못하고 일주일에 5번, 6번, 4시간, 5시간씩 투석을 하고 있으니 도저이 돌볼 수 없어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자식들이 불쌍하다고 눈물을 흘리지만 애써 기도할 때는 그래도 감사를 말한다. 자신이 비록 병원에서 나갈 수 있을 지 모르지만 할 수만 있다면 자신도 누군가를 위해 섬기고 살기를 소원하고 기도하고 있단다. 넋두리와 분노 속에 있던 환자에게 찾아와 6개월 전 검정 비닐봉투에 담아온 우유를 손에 쥐어주던 부인처럼 우리도 저를 소박하게 섬기고 싶다. 그래서 우리 호스피스 봉사자들은 오늘도 팀으로 나누어 환자가 있는 가정으로, 병원으로, 비닐 하우스로, 그리고 기도로 저들을 세우는 데 힘을 주심을 믿고 감사 기도한다. 그리고 증오가 있고, 슬픔이 있고, 절망이 있고, 의심이 있는 곳에 영원한 예수님의 부활의 승리를 확신하며 감사한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消息)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喜樂)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사야 61장 1절 - 3절) 14. 푹 삶아 소독한 과일의 맛을 아시나요 남편은 오늘도 무엇이 그리도 마음이 불편한지,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부드럽지만은 않다. “내가 병원을 드나드는 그 시간만큼은 좀 부드럽게 대할 수 없나.....” 김 집사님의 원망 섞인 한숨 소리를 들으며, 갑자기 서러워지는 등뒤로 동생의 골수를 이식하고 나서 1년이 다 지나가는데, 아직도 집사님은 이식한 후유증에 모든 식구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특히 남편의 곱지 않은 눈초리를 대할 때마다 스트레이드 계통의 약을 과다하게 복용한 후유증 때문에 몸이 저절로 구부러진다. 94년 6월. 집사님은 몸살 감기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무언지 모를 이상한 느낌에 찾아간 병원에서 여러 검사 후 판명된 병명은 백혈병. 언젠가T.V에 비친 백혈병 아이들의 그 고통, 절망들이 일순간 집사님의 다리를 휘청이게 한다. 환자들은 치료 받으면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병원들과 그 주치의사들을 향해 막연한 기대를 갖고 끝이 없을 것 같은 순례길을 행하는 연약한 군상들이다. 골수이식에는 일가견이 있는 의사일지는 모르나 환자들에게는 무슨 권위를 그렇게 부려야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언제나 환자 위에 군림하는 그 의사들에 대한 거부감 속에서도 환자이기에 무조건 당해야 할 것으로 알고 앞으로 골수이식을 받고 치료할 때까진 참고 또 참고 기다린다. 그러나, 집사님에게 내려진 1차 결론은 나이가 너무 많아 이식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항암제를 맞아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은 동그란 머리와 동그란 눈에서 말씀을 할 때마다 떨어지던 눈물...... 퇴원하여 맛있는 것 많이 먹고, 편안하게 있어야 한다고 쫓아내다시피 내어 쫓기던 병원에 대한 고통으로 또 깊은 상처를 갖고 있다. “주님 도와 주십시오! 주님 도와 주십시오!” 어디라고 할 것 없이 하늘을 향하여 그곳에 계실 하나님이 자신의 간구를 들으시길 얼마나 소원했는지... 그렇게 고통을 주던 근 일년간의 병원의 치료와 골수 검사를 통하여 나이가 골수이식에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안고, 그래도 한번이라도 시도해 보자고 했던 검사에서 4명의 형제 중에 한명이 집사님의 골수와 정확히 맞았다. 그래도 염려와 걱정이 앞서기는 마찬가지다. 과연... 95년 5월 2일. 거절당한 병원에서는 신뢰를 할 수 없어 다시 수소문하고 상담하며 찾아간 C병원에서 골수이식 시술에 들어갔다. 기대와 두려움 속에서 이식 숙주 거부반응인 면역싸움이 있었으나 다량으로 복용하는 스트레이드 계통의 약물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다. 하루 종일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어지럼증과 피곤에 지쳐서 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예능대 입시생인 딸 아이의 뒷바라지도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마음을 누를 땐 정녕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하랴...... 끼니 때마다 나오는 모든 음식은 무균처리를 하느라고 밥그릇, 국그릇 위에 또 다른 뚜껑을 덮고 그위에 뜨거운 증기로 소독을 해온다. 밥상에 딸려온 과일과 모든 채소, 음식물은 다 이렇게 철저한 소독을 해오니 유난히도 씹는 것을 좋아하던 그에게 입에 씹히는 감촉이란 있을 수 없다. 목사님 푹 삶은 소독한 과일 맛 어떤지 아셔요? 씁쓸히 희미한 미소를 지우며... 다만 살기 위해 억지로 먹어야 하기에 수도 없이 터져 나오는 구역질을 겨우, 겨우 참아내며 고약한 냄새와 맛을 이겨내야 했다. 눈의 피로는 앞을 볼 수 없게 만들고, 입안이 모두 터져 버린 볼태기의 쓰라림은 아무 것도 먹을 수 없고, 염증이 곳곳에 돋고, 황달이 심하여져서 매일 매일 증폭되는 재발의 불안... 남편은 처음에는 간병에 정말 열심이었다. 부인을 위로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드는 엄청난 비용을 자신이 그동안 충분히 벌어놓은 돈이 있어 치료시켜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오히려 긍지를 갖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였나, 집사님이 찾는 주님의 도우심이 커 갈수록 더욱 자신의 몫을 잃어 버리고 있는 느낌을 남편은 갖는가 보다. 그래서 서서히 불평을 하고, 짜증스러운 볼멘 소리를 내뱉어 버린다. “내가 벌어서 당신을 치료해 주지, 무슨 하나님이야 뚱딴지 같은 소리 마라 엉!” 자신만을 인정해 주길 원하는 남편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고통 속에서도, 이식이 성공할까? 하는 불안 속에서, 재발의 두려움 속에서도... 성경은 집사님에게 말씀하신다. 예레미아 29장 11절의 말씀을 들려준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平安)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예레미야 29장 14절의 말씀이 이루어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평안과 소망을 누리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갖고 투병할 때 95년 가을, 집사님은 그렇게 원하시던 본 곳으로 되돌림을 받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제는 삶은 과일을 먹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15. 9시간 전의 QT 1992년 12월, 환자에 대한 메모가 교구 담당 교역자로부터 넘어 왔다. 성명:엄 태상. 나이:35세. 병명:수술 불가 위암. 긴박감을 느끼며 그가 입원한 강남 S병원 병실을 방문했다. 형제는 두려움에 자포자기가 어린 듯한 눈빛으로 맞아 주었다. 그는 성우처럼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졌으며 키가 큰 미남자였다. 그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길 몇 시간... 놀랍게도 그의 응답은 “열심히 전해 주셨으니 믿어 보겠습니다”였다. 공포와 두려움은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형제에게 임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를 고백하는 놀라운 시간으로 이어졌다. 수술할 수 없는 위암을 항암주사를 맞으며 호전되길 소원할 때도, 그의 멋진 긴 머리칼이 한 가닥도 남지 않고 다 빠져 버렸을 때도 그는 믿음을 고백했다. “그래도 주님이 날 알고 계시고, 함께 계신다 생각허니께 참 감사해유! 이런 고통, 이 좌절을 예수님을 몰랐다면 어떻게 견디겄어유, 난 너무나 감사해유! 이젠 걱정 없시유!” 형제에게 정해진 3개월의 시한이 훨씬 지났을 때 의사로부터 수술을 해보자는 호전 통보를 받게 되었다. “이젠 됐시유, 이젠 정말 됐시유, 너무 너무 좋고, 감사해요” 마냥 즐거워하고 감사를 연발하던 엄 형제. 머리칼이 없어 약한 바람에도 감기에 잘 걸린다고 모자를 쓴 그는 예배 드릴 때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였고 옥 목사님께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은혜받아야 되니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수요찬양 예배 때는 눈물과 감격으로 찬양하고, 주일날은 한 말씀도 놓치지 않으려 메모를 하며, “오늘 엄청 났시유, 주님이 날 너무 사랑하시는가 봐유!” 하며 매 주일 감격에 떨었다. 항암주사를 맞고도 회복이 덜 된 몸으로 다락방 예배에 나갔고 순장님, 순원들이 자신을 너무 사랑해 주셔서 그 은혜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 줄 모르겠다던 엄 형제였다. 하나님 말씀이 그렇게 단 줄은 몰랐다던 고백과 함께 엄형제는 93년 8월, 수술을 받았다. 그 때는 다 완쾌된 줄만 알았다. “목사님! 권사님! 나 몸 쪼끔만 추스리면 호스피스 할껏이유, 괜찮겄지유?” 하던 93년 10월 중순, 갑자기 아무 이상없던 옆구리가 결리고, 배가 아프다는 연락이 왔다. 다시는 재발되지 않기를 그렇게 기도했고, 확신을 갖고 있던 그에겐 너무나 큰 낙심의 선고였다. 이 낙심이 우리에게도 너무나 큰 아픔이었고 눈물의 기도 제목이 되었다. 낙망 중에 있을 형제를 심방하기가 너무도 괴로왔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낙망 중에 시편 3편의 다윗의 신앙고백을 엄 형제의 신앙고백으로 바꾸어 주셨고, 그가 언제나 거침없이 고백하던 “정말 감사해유!”의 고백을 우린 다시 들을 수 있었다. 93년 11월 말, 우린 엄 형제를 양지에 있는 「샘물 호스피스」에 의탁하기로 하고 그에게 거처를 옮기게 했다. 형제는 그곳에 잘 적응하였고, 많은 도움으로 통증을 벗어나 다시 또 충만한 생활을 시작했다. 93년 12월 21일, 예정에도 없이 형제를 돌보시던 P권사님께서 갑자기 형제를 심방하자고 제의하셨다. 이른 아침 다른 환자의 병상세례를 집례하고 곧바로 형제를 찾아 양지로 떠났다. 형제는 우리를 반갑게 맞으며 그동안 자신이 묵상한 큐티 노트를 보여 주었다. 그는 나에게 세례를 받고 싶어 연락을 했지만 부재중이라고 말을 했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해 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했다. 여호와 이레로 준비된 병상 세례! 그곳에서 환자를 섬기시는 원 목사님과 장로님, 간호사,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병상세례를 집례하게 되었다. 형제는 그날밤 큐티노트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과 하나되어 연합된 세례, 이 감격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 2번이나 주님이 친히 오셔서 기도와 찬송과 성경을 읽어 주셔서 깊은 잠을 이루었다. 오늘 온전히 맡기지 못한 마음의 부분들을 회개하며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주님께 맡긴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우리 엄태상 형제는 94년 1월 6일 0시에 전도서 3장1절-11절, 14절을 묵상하고 구절 구절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 자신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신앙고백을 했다. 엄 형제는 자신의 삶의 여정이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도서 3장 14절)라고 고백하고, 기운은 없지만 성령충만을 주심을 감사하고, 하루 속히 전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형님들, 친척들을 구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딸 둘과 부인이 자신으로 인하여 시험들지 않게 기도하고, 다락방과, 순장님과 사랑의 교회와 또, 자신을 헌금으로, 기도로 섬겨준 모든 분들과 호스피스들 모두를 위해 세세히 기도했다. 큐티와 기도를 마치고 집에 전화해서 “여보! 나 참 평안해” 하며 몇마디 말로 위로하고 깊은 잠을 이룬 시간이 아침 9시였다. 37세 생일이 1월 15일인데 그 며칠을 앞두고 그는 영원한 본향을 찾아갔다. 그가 어릴 때 뛰놀던 공주 동산에 하관하며 산을 내려오는 우리들의 귀에 “참! 감사해유. 이젠 됐시유. 안심하세유.”라고 언제나 스스럼없이 말하던 그의 소리가 바람결에 들리는 듯하여 자꾸만 뒤를 돌아다 보았다. .............................................................................................. * 「샘물 호스피스」는 93년 7월, 말기 환자들을 고통으로부터 영적, 육적으로 섬기기 위해 세워진 자원봉사 단체이다. 원주희 목사님을 비롯해서, 의사, 간호사, 약사, 자원 봉사자들이 상주하고 있다. 이곳의 운영은 1구좌 1,000원의 헌금으로 운영되며, 여기에 위탁되어 있는 환자는 무료로 섬김을 받는다. 고 엄태상 형제는 이곳에 위탁된 첫번째 환자로 93년 11월 26일부터 94년 1월 6일까지 섬김을 받았다. 본지를 통해 「샘물 호스피스」 모든 봉사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모든 기도의 제목들이 속히 응답 받길 소원하며, 「샘물 호스피스」가 시설 호스피스로 모든 면에서 잘 정착되도록 우리 성도님들께 더욱 많은 기도와 관심을 부탁 드린다. 16. 이어지는 십자가 94년 1월, 호스피스 첫 모임과 새로운 봉사자의 보고는 우리를 흥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박수와 축하소리만으로는 부족한 듯 너나 할것 없이 감격하여 한 마디씩 거든다. 작년 5월 중순,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졸이게 하고 아프게 하던 상국이가 이제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여 호스피스로 첫 환자를 맡아 보고를 하고 있다. 93년 5월 23일. 상국이는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마치고 청년부 모임에 참석 하던 중 피를 토하며 쓰러져 급히 K의료원으로 옮겨졌다. 오른쪽 옆구리에 구멍을 내서 호스를 40cm가량 몸안에 넣고 그곳을 통해 진물과 고인 피와 공기를 빼내고, 입안으로는 엄지 손가락보다 굵은 호스를 20cm가량 넣어 인공호흡을 하던 상국이였다. 93년 5월 25일, 새벽 3시에 그에게는 절대 절명의 위험한 순간이 닥쳐 왔다. 목숨이 점점 꺼져가는 징조들이 나타났다. 점점 의식은 희미해졌다. 그런데 어떤 꿈을 꾸었나 보다. 그때 그는 직선으로 잘 정돈된 길을 달려 가고 있다 생각했으나, 달려가기 보다는 더 빠른 속도로 날아 가는 듯 싶었다. 먼 곳을 바라보니 뾰쪽한 산이 세 개가 보였다. 그 중 중간의 산이 가장 높아 보였는데 그 산에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계심을 보았다. 가까이 도달했을 때 그 분은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고 계셨고 그분이 입으신 흰옷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계셨다. 그 분은 다름아닌 예수님이셨고, 오른손을 내미시며 “상국아 가라”고 말씀하셔서 상국이는 오던 길을 되돌아 왔는데, 얼마나 방해하는 손길들이 많던지 몸부림치며 깨어나게 되었다. 상국이는 격리된 병상에서 23번째 생일을 맞았다. 입에 꽂혀 있는 호스 때문에 먹을 수 없는 상태였기에 케익을 들고 가서 눈물로 생일 파티를 했다. 축가를 불러 주시던 호스피스 권사님도, 그를 섬기는 호스피스 권사님도, 그에게 마지막으로 병상세례를 베풀던 나도 “하나님 아버지 너무나 할 일이 많습니다. 이 형제에게 한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다시 회복시켜 주십시오”라고 눈물로 간구하는 파티가 되었었다. 형제를 섬기던 호스피스 집사님은 그에게 십자가를 선물하셨는데 상국이의 목에 걸린 호스가 하도 많아 걸어 줄 수 없어 너무 아쉬워했다. 그렇게 수없이 기도하던 사람들을 애태우던 상국 형제. 이제 그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자신의 생명을 지켜 주었던 그 십자가를 다른 형제의 손에 쥐어 주며 절망과 고통 속에서 만난 하나님 아버지, 그 분이 주신 은혜를 간증하며 폐암에서 뇌암과 간암으로 전이된 형제를 섬기는 호스피스로 활동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 올해는 또 다른 상국 형제가 많아지게 해 주세요. 그래서 더욱 연약한 자들을 섬기는 호스피스가 많이 자원하길 기도합니다.”라고 소원한다. 17. 그리울 땐 기도하며 엄마를 만나요 엄마가 보고 싶을 때는 무얼하지? 빠지고 벌어진 이빨 사이로 미소를 흘리며 “기도하지요!” 말하면서 유난히도 큰 눈망울에 촉촉이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담는다. 호스피스 환자 수첩을 꺼내어 매달 초순에 점검하는 하나의 작업이 있다. 그것은 우리 호스피스의 섬김을 받다가 이제는 하나님 품에서 쉼을 얻고 평안을 누리고 계시는 분의 기일에 맞추어 1주기 추도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가족에게 연락하는 일이다. 3월 25일. 호스피스와 연결되는 때는 누구나 어려운 상황에서 만나지만 이 가정은 더욱 그랬다. 남편이 먼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1년 후 부인도 자궁암과 골수암으로 당시 중2, 초등4, 초등 2년생인 2남 1녀를 두고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긴 것이다. 고 조 필안 성도. 우리 교회의 어느 집사님과 같은 병실에 입원했던 동기로 우리 호스피스 팀와 연결되었다. 한이 많았던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며 슬퍼하던 여인. 3개월의 호스피스 섬김 이후에 드디어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였다. 그렇게도 큰 고통과 통증, 그리고 썩은 고름 냄새 속에서도 소망과 안도를 가졌다. 고통 속에서도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할 때 “그래도 나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어요? 남은 사람에게 예수님 전하지 다른 일 있겠어요!” 하던 여인. 오늘 그의 큰 아들 일영이는 중등부에서 연극을 한다고 자랑을 한다. 마침 엄마의 1주기 추도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들른 목사에게 원정이라도 청하듯 자기 이종 사촌에게 전도를 한다. 일격을 받아 얼굴이 빨개지며 엉거주춤 교회에 나가기로 약속하는 한 살 많은 이종 형. 일영이는 형으로부터 교회 간다고 대답을 들은 것이 너무나 흐믓하여 의기양양하다. 작은 딸 선희는 언제나 목에 십자가를 걸고 다니며 자기들을 걷어준 이모의 딸에게 예수님을 믿고 우리 교회 함께 가자고 약속을 하지만 번번히 잘 지켜지지 않아 속이 상한다. 막내인 재영이는 키가 많이도 컸고 엄마가 보고 싶을 때는 기도를 한다며 엉성한 웃음을 띤다. 이모의 이야기는 또 가슴을 때린다. 자신의 동생을 세상은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버리지 않으셨다고 감사해 한다. 그런데 그의 남편은 사업이 잘못되어 집을 나가 소식을 끊은 지 벌써 오래 되었고 생활도 어렵다고 한다. 동생의 자녀 2남 1녀와 자신의 자녀 1남 1녀를 혼자 맡아야 했을 때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고백을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사역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세월이 참 빠르다. 호스피스를 우리 교회에서 시작하며 첫 환자를 돌보기 시작한 지 2월 1일로 만 6년이 넘어 7년으로 치닫고 있다. 이 7년 동안 수많은 환자들이 우리 호스피스의 섬김을 필요로 하였다. 지금 현재도 많은 환자들에게는 우리의 섬김이 필요하다. 이렇게 하늘에도, 세상에도 열매가 있기에... 18. 주 손으로 덮으시네 온 세상이 벚꽂과 진달래와 개나리로 충만한 봄날. 94년 4월 14일, 오후 6시 57분, S병원 107병동 1039호. 우리가 오랫동안 기도하며 사랑하던 이 은주 집사님께서 어느 땐 소망, 또 어느 땐 좌절도 주었던 4년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셨다. 446장 찬송의 「주 손으로 덮으시네」를 부르며... 90년 6월부터 시작된 유방암과의 투병. 처음엔 수술로 모든 어려움이 회복되겠거니 기대했다. 조바심과 불안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었다. 거의 2년이 될 무렵 다시 한번 무거운 멍에는 씌어졌다. 암이 전이되고 재발되어 다시 수술대로 집사님을 끌고 올라갔다. 믿음이 연약할 때는 그렇게 두렵고 떨리며 무서웠는데 예수님이 너무도 가까이 계심을 확신한 2차 수술 때는 달랐다. 마취에서 깨어 났을 때,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18편을 혼미한 기억 속에서도 정확히 고백하셨다. 2년을 조금 넘기며 집사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새로운 기대였고 도전이었다. 우리가 다녀온 다음 주에 심방을 가보면 전 주에 어떤 성경을 갖고 집사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집사님은 미술 전공으로 여학교 선생님을 하셨는데 유난히 붓글씨를 잘 쓰셨다. 그 잘 쓰시는 솜씨로 B-5 용지 크기에 성구를 써서 냉장고며 벽이며 눈에 띄는 곳마다 붙여 놓았다. 집사님에 의해 성구를 달고 그 말씀을 먹지 않은 가재도구가 그 가정엔 없었다. 벽은 벽대로, 냉장고는 냉장고대로, 전축은 전축대로... 자신들이 매달고 있는 성구를 암송한다. 집사님은 재발되고 전이된 자신의 병에 대해 담대했다. 암의 통증이 어떠해도 자신이 그것을 이길 수 있다고 믿고 계셨고 확신했다. 그러기에 재발된 이후에도 그것에 매여 괴로워하지 않았다. 우리 호스피스가 환자들의 투병을 위해 조직한 “주부 찬양팀”의 한 멤버가 되어 그늘지고 소외된, 영혼이 병든 자들을 찾아 다니며 찬양과 성경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했다. 3월 말경, 급히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이 집사님의 연락을 받았다. 병실을 찾아 갈 때 어우러져 피어 있는 진달래가 너무도 예뻤다. 안되는 줄 알지만 이 집사님을 위해 잠깐 한 가지만 실례를 했다. 집사님은 너무나 기뻐하며 또 소중히 두 손으로 안아 보고 머리에 꽂으며 하도 좋아 하시기에 나는 하지 말아야 될 약속을 했다. “집사님 다음에는 개나리를 많이 꺾어다 줄께......” 내가 왜 그런 약속을 했는지, 하나님 아버지는 온 세상에 노랗게 개나리를 뿌려 놓으시고 우리 이 은주 집사님을 초청하셨다. 이 집사님이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기려는 마지막 시간,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인사하시기를 “모두를 사랑해, 모두에게 감사해......” 그리고 조용히 46년의 짐을 벗으셨다. 이 집사님의 마지막 인사를 받으면서 얼마나 큰 위로가 그 슬픔 중에 있는가를 깨달았다.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천국에서 만남의 소망이 없다면 집사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인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은 언제나 생명있는 자의 인사이기에,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은 언제나 소망있는 자의 감격이기에.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은 언제나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격려요 능력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이 집사님을 생명의 감격으로 부르셨다. 소망의 꽃들이 어우러진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의 속에서 그 약속을 이루셨으니 너무나 감사하다. 이젠 그 남은 가족들에게 이런 충만한 위로와 소망을 주실 줄 믿는다. 지금껏 집사님을 사랑하고 위해 기도하고 함께 섬기던 모든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도 이 충만한 기쁨을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한다. 19. 간 이식의 다른 의미는? 94년의 분주함이 시작되는 1월 중순, 최 영식 성도는 간경화와 간암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45세의 나이가 말해주 듯 최 선생님은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해 보였다. 물론 하나님이니, 예수님이니, 신앙이란 단어는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교회 권사님이 그를 심방하셨는데 “제발 오시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교구 담당 전도사님은 전하신다. 가족들의 애타는 심정과 담당 전도사님의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에 한 영혼의 중함을 실감하면서 염려를 갖고 병상을 찾았다. 믿음을 이야기하고 투병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최 선생님은 호스피스의 돌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얼마후 오히려 심방을 기다렸다고 말씀하실 때 남자 호스피스 류 집사님과 우리는 큰 기쁨을 맛보았다. 최 선생님은 믿음이 자라갈수록 달라지는 것이 현저했다. 비관하던 옛날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보살피심과 사랑을 느끼면서 병마에 시달리는 현재를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찬송하려고 애썼고 말씀을 읽는 아름다움을 갖게 되셨다. 어느날 급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인가! 마음에 의구심을 안고 전화를 받았다. “목사님, 지금 간 이식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AB형의 젊은 형제들 혈액이 필요한데 어떻게 하지요?” 이런 때를 대비하여 우리 호스피스는 초기 때부터 준비해 왔다. 매년 우리 교회 청년부와 대학부의 협조로 꼭 필요할 때 도움을 주기 위해 혈액형 검사와 헌혈 자원 봉사자를 확보해 두었다. 그동안 여러번 청년․대학부의 귀한 자원봉사자가 여러 환자에게 도움을 주었다. 이번에도 많은 청년․대학부의 귀한 섬김을 통해 헌혈자는 확보되었지만 갑자기 환자가 열이 올라 시간을 조금 지체하였는데 설상가상으로 간을 기증해 주려던 뇌사자가 수술을 준비할 때 소천해 버린 것이다. 이식을 기대하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그렇게 흥분하시던 최 선생님을 어떻게 찿아 뵙고 위로하나...... 난감함만이 나를 감쌌다. 중환자실에서 내려 오시는 최 선생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위로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하나님 아버지 어떻게 하지요? 그런데 최 선생님이 먼저 입을 여셨다. “목사님, 무엇인가 하나님의 다른 뜻이 있으시겠죠?”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놀라울 정도로 평안을 갖고 환자는 다시 투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다시 또 기증자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준비를 하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기증자의 간이 환자보다 더 좋지 않다는 통보를 받는 바람에 2번째 이식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실패로 돌아 갔다. 설상가상으로 이젠 신장이 너무 나빠져 소변이 나오질 않아 이틀에 한번 5시간씩 투석을 하는 어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환자는 자신이 당하는 질고가 클수록 더욱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나아왔다. “목사님, 이제 나도 세례를 받고 더욱 당당한 믿음으로 서기를 원합니다.” 미쳐 생각도 못했던 환자의 고백에 우리는 5월 7일 오후 2시 30분으로 날을 잡고 준비 기도를 시작하고 세례를 준비하였다. 세례를 행하던 병실은 호스피스 류 집사님 부부가 만들어 오신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고, 3분의 여자 호스피스 집사님이 축하하기 위해 함께 동참하였다. 눈물과 기쁨이 충만한 신앙 고백을 드린 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는 베풀어 졌다. “하나님 아버지! 여기 우리 최 선생님이 병상에서 형제 두분께 전도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셨어요. 하나님 앞에 가실 때는 부부가 모든 장기를 어려운 환자, 고통 받는 환자를 위해 기증하시기로 하셨대요!” 우리는 최 영식 성도가 소원인 사랑의 교회 올겐소리에 맞추어 찬송과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날을 주님께 간구한다. 최 영식 성도는 자력으로 소변을 볼 수 없었는데 세례받기를 소원한 아침, 조금이지만 소변을 볼 수 있었던 일로 감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제 그는 다른 병실에서 투병하는 환자를 찾아간다. 오늘도 환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는 성도들의 기도에 힘입어... 20. 샬롬회의 탄생 “칫! 아빠는 왜 죽어버렸어? 엄마! 아빠를 불러오면 안돼? 지들은 아빠 있다면 다야? 언니, 언니는 절대 학교 가서 울 아빠가 죽었다고 말하지 마 알았지!” 초등학교 2년생인 둘째 딸이 4학년생인 언니에게 훈계 아닌 훈계(?)를 한다. 학교에서 새 학년이 되어 가정환경을 조사할 때 아빠가 일찍 떠나버려 자존심과 외로움이 폭발했나 보다. 그렇게 자상하고 좋기만 하던 아빠. 어느날 병원에 다녀온 다음부터 온 집안은 회색 빛으로 바뀌었다. 어느날이던가, 아빠는 그 까맣기만 하던 머리가 한 웅큼씩 빠져 나가버리더니 한 올도 남지 않게 다 빠져버리셨다. 눈발이 날리던 날 아빠는 떠나셨다. 벌써 5개월이 되어 가지만 지독한 그리움으로 고생하는 것은 두 애들이나 엄마나 마찬가지다. 남편이 투병 중일 때 금방 치료 받고 일어나면 될성 싶어 이리 저리 돌려 쓴 치료비와 생활비는 그 얼마인가! “미안해!” 미안해 하던 남편은 애들과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는 연약한 부인을 빚과 함께 남겨놓고 떠나버렸다. 부인은 할 수 없이 직장을 갖고 남겨진 빚을 갚기 위해 온갖 애를 쓴다. 언제나 모자란 생활비를 위해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집에 오면 어린 딸은 빨래를 개켜놓고 집안을 청소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눈물로 그리움과 아픔의 시간을 보낸다. 일을 하다가 지쳐서 잠깐 졸았어요. 밖에서 남편의 구둣발 소리가 나고,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 얼른 눈 비비고 일어나 여느 때 하던 대로 “당신이우!” 하며 문을 열어 주었죠. 그러나 거기는 남편이 없었어요. 찬 바람만 획 불어 들어오는 것이에요. 정신이 번쩍 들며 눈물이 죽 흘러 나오는데... 언제쯤이나 눈물없이 하루를 지내지요? 아이들이 전에 자기 아빠 계실 땐 이렇지는 않았어요. 학교나 가정생활도, 모든 것이 문제예요. 저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야 되는지 좀 알려 주세요.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해요. 더 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으며 살고 싶어요. 노력하는 모습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요? “서로가 너무나 견디기 힘들어 서로의 손을 잡아 주어야 했습니다. 먼저 어려움 당한 우리가 모여서 또 나와 같은 어려움에 처한 자에게 힘이 되기 위해, 그 고통의 터널을 함께 가기 위해 모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짝을 잃고 말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모임을 통해 우리에게 숨어있는 은사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개발시켜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호스피스 사역을 시작하며 1년 이상 준비하던 혼자된 사람들의 모임이 시작되던 날. 서로가 한 마디의 말을 할 때마다 마음 속으로 깊이 공감하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모임의 이름을 “샬롬(Shalom)회”라 명명했다. 「평안」이라고. 우리의 평안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 안에만 있으므로... “슬퍼할 시간이 없는 사람은 마음을 치료할 시간도 없다.”고 좐던이란 사람은 말한다. “소화가 안되고 목이 탁 막히고 숨이 가쁘고 눈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낍니다.” 사별에 의한 슬픔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잠시의 기간 동안은 예상하는 것이지만 긴 시간 동안 지속되면 사회적으로도 용납받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사별을 당한 사람은 강한 모습을 보이려 하고 상실을 경험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려고 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상태에 자신을 맞추고 회복하는 것 아닌 적응을 합니다. 우리에게는 때때로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 슬픔을 부인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아닌 척하고 싶어도 그렇지 못할 땐 죄책감도 갖습니다." 남편이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것이 가족의 책임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의식 속에 언제부터인지 이들이 설 수 있는 자리를 자연스럽게 밀어 내고 있지 않은지... 우리 교회에는 이런 가족들의 모임이 있는데 샬롬회라고 명명하고 서로를 세워주기 위해 모여 기도하고, 교제를 나누고 있다. 서로의 아이들에게 이모가 되고, 서로에게는 언니와 동생이 되어 혼자서는 풀 수 없는 일들을 풀어 나간다. 21. 호스피스를 위한 나의 고백 아직은 뗏장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중간 중간 뻘건 산흙과 바래버린 잔디가 봉분을 이루고 있다. S집사님! 우리와 두 달 정도 계실 동안 그렇게도 삶에 대해 철저하셨던 분. 이젠 천국에서 아름답게 주님과 함께 하시리라. 유족에게 내일의 소망을 두고, 앞서서 파아란 하늘과 하이얀 구름 사이로 산허리를 돌아 서울로 향하는 마음에 지난 수년이 창 밖으로 흐른다. 83년 광복절. 전자공학이 전공이었던 나는 가족을 데리고 늦은 유학 겸 이민을 떠났다. 「미국」을 새로운 비전으로 알고... 얼마 있지 않아 심각한 질병을 갖고 거의 사경을 헤메다, 주님의 은혜로 치료를 받았을 때도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 거의 5년의 이민 생활, 사업으로 돌아선 나의 작은 일터에서 신유은사를 통해서 주님의 부르심을 체험했다. 주님은 내 나이 36세의 조금은 늦는 나이에 새로운 변화의 장을 일구게 하셨다. 그 분은 왜 처음부터 나를 환자들 속으로 부르셨을까?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냥 환자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안타까웠다. 환자를 찾아다니며 기도해 주고 위로할 때마다 내 가슴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넘쳤으며 사역의 보람을, 감동적인 희열까지 느끼게 되었다. 92년 1월, 사랑의 교회의 중진들의 기도 모임에서 P권사님의 간증 시간이 있었다. 권사님과 몇 분은 자의로 환자 몇 명을 돌보고 있었는데 이제는 전문적인 교역자의 도움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이 간증을 듣는 나의 마음은 한없이 뛰고 뛰었다. 언제나 내 주변에 환자들이 끊이지 않았던 6년의 훈련의 의미를...... 다음날 옥 한흠 목사님을 뵙고 이 사역을 나의 소명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이것이 사랑의교회 호스피스 사역의 시작이었다. 92년 2월 1일. 가르치는 교회, 전파하는 교회, 치료하는 교회의 비전 가운데 한 부분을 맡아 6명의 자원 봉사자들을 중심으로 환자 사역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교회의 중진들이 봉사자로 동참했다. 하나님은 이 봉사자 중에 2명의 호스피스 교육을 받은 J , K 권사님을 예비하셨고, 호스피스라는 봉사영역이 자연스럽게 환자 사역에 접목이 되었다. 우리가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섬기게 된 첫 번째 환자는 대장암에서 전신으로 전이된 말기의 암환자였다. 이 환자를 섬기면서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깊이있게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호스피스 사역을 허락하신 주님을 향한 감사의 시작이었다.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신 한 영혼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지금까지도...... 호스피스 환자가 선정되면 나는 그들을 심방하고 먼저 그들의 필요를 파악한다. 그때 그때 기도와 말씀으로 해결될 환자는 대부분 몇번의 심방으로 끝이 나지만 지속적으로 섬겨야 할 환자라면 매주(여자:목요일 10:00. 남자:주일 9:00.) 열리는 호스피스 기도회와 봉사자의 영성훈련의 자리에서 환자들을 소개해 주고, 자원하여 맡을 수 있도록 한다(현재 우리는 매주 50-60여 명의 환자를 섬기고 있다). 우리에게는 철칙이 있다. 환자를 섬길 때 절대로 환자에게나 가족에게 조금의 부담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냉수 한그릇이라도 대접 받기보다는 오히려 대접할 수 있도록 교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자원봉사자에게 활동비를 정액 지원한다. 자원봉사자들은 한주간 1회 이상 자신이 맡은 환자를 섬긴다. 환자가 좀 어려운 상태라면 자신이 속한 팀에서 팀장(현재 사랑의 교회 호스피스는 14개 팀이 운영되고 있다)의 재량으로 조를 편성하여 섬길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호스피스 담당 교역자가 가능한 한, 환자들을 한 주에 1회 이상 심방하여 섬긴다.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환자는 개인의 차이는 있으나 보통 우리의 지지나 섬김이 3일 이상 지탱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호스피스 섬김은 영적인 섬김을 우선으로 하고 다음이 육적인 섬김, 물질적인 섬김이라고 믿고 이렇게 행하고 교육한다.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들에 있어서 영적인 충족은 참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 교회는 이 부분을 특별히 강조하여 매주 기도회 뿐 아니라 매 분기별(년 4회) 수련회, 호스피스에 필요한 교육 등을 통해서 봉사자의 기쁨을 느낄 수 있게 그들을 위해 노력한다. 우리 교회는 호스피스 자원 봉사자들을 수시로 교회 앞에 광고로 모집을 한다. 그래서 매년 실시되는 교육을 수료한 자로 환우들을 위해 자신을 드려 주님께 섬기듯 섬기려는 사람들이 모여 사역을 한다. 98년 9월 현재 호스피스 봉사자로 섬기는 인원은 여자 100여 명, 남자 10여 명이다. 또 우리 뒤에는 수많은 기도 후원자들의 섬김이 있다. 우리 봉사팀에는 1팀의 중창단이 있고, 호스피스를 통한 병원 선교도 96년 9월부터 5개 병원을 섬기고 있다. 호스피스 사역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섬겨야 할 부분은 남은 가족들이다. 홀로된 가정은 호스피스에서 사후관리 차원에서 돌아보고 섬긴다. 이들을 위해 94년 9월 「샬롬회」라는 모임이 발족되었으며 이 모임을 통해 가정이 치유되는 역사가 나타나고 있다. 98년 겨울방학에는 혼자된 가정의 어린이들을 위한 치유 켐프가 실시될 것이다. 아동 심리학자, 아동 상담가, 또 소아 정신과 선생님의 참여 속에 치유를 위한 레크레이션 등을 통해 상실로 인해 상처 받은 어린 영혼들을 치유하려는 사역이다. 그동안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들 중 남,녀 2명이 자신들이 돌보던 환자에게 신장을 이식시켜 주어 그들이 새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기쁨도 맛보고 있다. 앞으로 사랑의 교회 호스피스는 여러 호스피스 단체와 계속 협력사역을 추구하려고 한다. 우리 교회 목표인 지역 선교에도 한 부분을 담당하기 위해 지역 보건소에서 추천하는 소외된 환자 중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섬길 준비를 하고 있다. 또 병원선교를 개선하여 지금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방식이 아닌, 환자를 직접 돌보는 수준 높은 차원까지 끌어 올리기 위해 계속적인 연구와 기도 속에 사역을 하고 있다. 호스피스에 관심있는 모든 분들의 계속적인 기도를 부탁한다. 샬롬! 22. 장군님의 병상 세례 문 대령님! 그는 자세를 곧추세우고 좋은 인상을 갖고 계신 분이었다. 일생을 다 바친 군생활에서 언제나 충성스런 군인으로 남아 명예롭게 은퇴하려고 했다. 그는 정말 건강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투철한 군인 정신 만큼이나 건강에도 자신감이 넘쳤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친구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별로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몇 잔 마신 것이 큰 화근을 일으킬 줄이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운전 중 잘 볼 수 없었던 곳에서 뛰어오는 한 자매를 피할 길도 없이 사고를 내고 말았다. 이 사고는 그로 하여금 영원히 해군의 탁월한 지도자로 남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 낙심과 허무만이 그를 혼돈 속으로 밀어 나락에 떨어지게 하였다.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그는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피로와 권태를 느꼈다. 시간을 달랠 겸 계속 탐독해 오던 불교의 경전도 지겹기는 매 일반이었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을 누르고 찾아간 병원. 그곳에서 내린 진단은 너무도 문 대령님에게 충격적이었다. “아니 무슨 소리야! 내가 간암? 그럴 수는 없어, 무엇인가 잘못된 거야.” 거듭 확인을 통해 내려진 결론에는 다른 이론이 있을 수 없었다. 그에게 내려진 판결은 3개월의 시한부 인생이었다. 장군으로 진급을 앞둔 때도 그렇게 초조하고 애닯지는 않았다. 속은 타고, 마음이 갈하여, 하루에도 몇번씩 염주알을 돌려 보아도 염주알이 제자리로 돌아오듯 허무와 낙심과 고통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수 십년의 군인정신도, 그렇게 칭찬 받던 의지력과 판단력과 결단력도 엄습해 오는 허무감 속에서 그를 건져내지 못했다. 진급을 그렇게 소망했었는데... 어이없이 날아가 버린 꿈. 어떻게 이럴 수가? 이제 남아 있는 생명의 시간은 3개월. 아! 어떻게 해야 되지? 딸 둘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즈음 문대령님의 부인은 주변의 권유로 우리 교회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에 대한 막연한 만남을 시작하셨다. 많은 믿음의 식구들은 대령님과 부인과 두 딸들을 위해 기도와 간구로 저들의 아픔에 동참하고자 깊이 있는 배려를 했다. 이들의 안타까움은 우리 호스피스에 연결이 되고 자연스럽게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대령님은 전에는 그렇게 열심있는 불자(佛子)는 아니었으나 마땅이 의지할 곳이 없었기에 자신의 위기속에서 받아들여지는 불경에 대한 열심이 우리의 찾아 들어갈 자리를 거부하고 있었다. 수일이 지났다. 계속되는 혼자만의 정진(精進). 그분이 돌리며 외우는 주문은 염주알의 공허처럼 허무한 것이었다. 하루 하루의 시간은 언제나 그분에게는 절망뿐이었고, 초조였다. 그분에게는 평안이 필요했다. 위로가 필요했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해 주는 지지자가 필요했다. 오히려 재앙 가운데 있는 것 같은 현실에서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소망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찾아 오심을 갈망하게 되었다. 대령님이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 왔다. 호스피스 봉사자인 이 권사님과 다락방의 순장님과 함께 찾아 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평안을 선포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바로 당신의 죄와, 허물과, 질고와, 질병과, 고통과, 외로움과, 아픔과, 불안을 위함이라 말씀드릴 때 성령님은 이제껏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셨던 은혜를 폭포수처럼 쏟아 주셨다. “나의 지금껏 무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주님! 내가 주님을 믿나이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불쌍이 여겨주사 나를 도와 주소서!” 그는 눈물의 간구를 드렸다. 오랜 시간 자신만 혼자인 것 같던 외로움이 평안으로 바뀌자 그는 세례 받기를 자청했다. 세례 받는 날, 그는 정장을 하고 싶었으나 복수 때문에 배가 부풀어 올라 예복을 갖추지 못함을 미안해 하시며 세례를 진심으로 준비하고 계셨다. 봉사자들이 불러주는 축가를 들으며 흐르는 눈물 속에 빛나는 그분의 미소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평안이었다. 비록 대령의 신분이었으나 별을 다신 장군님으로 여유로움과 품위가 당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확실한 승진!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 새로 태어난 장군님의 승진. 이것은 많은 천사들도 흠모할 아름다운 승리였다. 96년 2월. 그로부터 한달 후, 이른 봄이라 잔설이 녹아 흐르는 포근한 봄날에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셨다. 그날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이 한 별이 되어 내 마음에 반짝이는 평안을 주시었다. 23. 종근이는 하나님의 기적 엄마! 내가, 죽는거야? 난,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내가 죽을 때 검은 망또 입은 자가 와서 나를 붙잡고 가면 어떻게 해! 엄마 나 좀 살려 주라고, 빨리 선생님한테 말해 줘! 이제 8살 된 종근이. 쉬어빠진 목소리로 겨우 겨우 한 마디씩 뱉어 놓는 아이. 그 또래 아이의 머리보다 2배는 커보인다. 그에게 붙여진 병명은 여러 합병증에다 척수 뇌종양, 지금껏 발병도 희귀하지만 치료가 되어 본 적도 없단다. 의학적으로 그가 호흡할 수 있는 특권은 아무리 길어야 3개월이라고 종근이 엄마는 눈물 짓는다. 이들 모자를 처음 만난 것은 95년 9월, 우리 호스피스의 S병원 선교팀이 사역을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아들의 고통에 목이 메여 숨죽여 눈물 지으며 애를 쓰던 종근이 어머니. 조상 묘를 잘 모시지 못한 탓이라고 원통해 하는 무당인 종근이 할머니의 소란이 한바탕 병원을 휩쓸고 간 뒤였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었고, 하나님 아버지는 그 가정도 사랑하셨기에 우리 마음에 안타까움을 더해 주셨다. 종근이는 모든 장기에 이상을 갖고 있다. 호흡도 시원스럽게 할 수 없다. 그러기에 산소 호흡기는 그에게 신체의 일부처럼 되어 버렸다. 또 그렁그렁 차오르는 가래를 혼자서 뱉어 낼 수 없기에 기관지를 절개하고 캐뉼라를 끼워 2-3분마다 흡입기로 제거할 수밖에 없어 시원스레 말도 할 수 없다. 바람이 빠지는 거의 모든 말은 엄마의 통역이 없이는 알아 들을 수 없다. 종근이는 집에 무척 가고 싶어 했다. 동네 친구들과 엄마의 젖가슴과 같은 둥그런 동산을 뛰고 달리고 싶고, 온 동리를 싸다니며 고래 고래 소리도 지르고 싶었던 아이. 그러나 몇 달 째 방사선과 항암치료의 고통이, 어린 몸뚱이를 2배가 되게 부풀러 놓아 버렸는데도, 치료가 불가능 하니 퇴원하라는 병원의 통고에, 아이는 너무나 놀라서 막무가내로 집에 가지 않겠단다. 그리고, 회진 오신 주치의 선생님을 보자마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겨우 겨우 한마디씩 말을 한다. “선생님, 나를 집에 가라고 하면 내 목도 막아주고, 숨도 쉴 수 있게 해 주셔야지요. 이대로 나는 갈 수 없어요...” 어린 것의 항의에 엄마도, 의사도, 목사인 나도 아픈 마음에 눈물이 흐르기는 매 한가지였다. 종근이와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 위로할 수 있는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목자가 되시기에 부족하지 않을 뿐아니라, 언제나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종근이와 엄마와 아빠와 할머니까지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대신 받으시길 원하셨으니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 오십시오. 주님은 우리 모두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며 회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가정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종근이가 낫는다면 무당까지도 버리겠다는 할머니.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겠다는 종근이 아빠, 엄마. 종근이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간절히 원한다. 종근이는 기도를 할 때 쉰 목소리로 아멘! 한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예수님이 얼마나 종근이를 사랑하시는지, 예수님은 종근이를 얼마나 치료하시길 원하시는지, 종근이는 눈을 반짝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전화가 왔다. “오늘 퇴원합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것 같다. “괜찮습니까? 종근이는 어때요?” 그런데 종근이 엄마의 대답은 우리를 안도 시키기에 충분했다. “기도 할람니다! 예수님이 지켜 주실 것을 믿기로 했어유! 이제 집에 가면 교회도 나가기로 작정했구유. 지 아빠하고도 약속했어유.” 병원에서 통고한 3개월은 벌써 지나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근이에게 기적을 주셨다. 밥 한 수저 먹지 못하던 종근이가 이제는 밥도 먹고, 가래도 줄어 들고 너무나 좋아지고 있다. 종근이 엄마의 밝은 목소리가 새로운 날에 대한 소망을 송축한다. 24. 하나님의 사람들의 행진 호스피스를 시작한 지 6년이 지나며, 그동안 세월이 흘러 수많은 환우들을 섬기면서 우리에게 어떤 의문점이 생겼다. 우리 호스피스의 활동이 환우나 그 가족들을 제대로 섬기고 있나? 어느 교회에서도 어떤 모델을 갖지 않은 호스피스 봉사, 어떻게 계속 이어갈까? 우리 자신도 어설픈 흉내의 자원 봉사 활동이 아닌가? 이것이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사역일까? 많은 주변의 사람들의 충고처럼 완전히 소모적인 사역만 계속하는 것 아닌가? 계속되는 봉사자들의 사역 포기와 또 다시 봉사자를 모집하여 훈련하고, 또 떠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사역에 엄청난 고통의 파도가 몰려 왔었다. “이 고통의 파도를 헤쳐 나가야 한다!” 우리 호스피스 남은 봉사자들의 각오였다. 그러기 위해 우리보다 100여 년 앞선 해외의 호스피스 사례를 보고 싶었고, 우리는 계획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계획을 그 해에는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우리가 다시 경성하도록 새로운 계획 가운데 우리를 회복시켜 주심을 느꼈다. 우리의 갈급함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무엇인가 좀더 점검하고 확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렇게 준비하고 기도하기 시작한 지 6년. 올해는 여느 때 보다도 해외에 나간다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결단에도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호스피스 봉사자 자신들이 모든 여비를 자비량으로 준비해야 한다면 자부담은 얼마나 큰 것인지! 거의 계획을 포기하고 모든 주변의 상황들이 호전되기를 기대 했는지도 모른다. 2월이 막 지나갈 무렵, 한 호스피스 모임을 통해 우리에게 제의가 들어 왔다. 호주, 뉴질랜드 호스피스 방문을 하도록 강권적인 참여 요청이 왔다. 그때부터 호스피스들은 쉬지 않고 기도했다. 97년 4월 25일. 18명의 호스피스를 인솔하고 기도의 응답을 품고 대망의 장도에 올랐다. 호주의 시드니, 갈보리 호스피스에 도착했다. 6명의 호스피스 스텝들은 우리의 열의에 놀라워하며 자신들의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강의하는 장면을 공개했으며 시설들과 직접 병상을 돌아보게 하는 성의를 보여 주었다. 말기암 전문의 80개의 침대를 갖춘, 그러면서 낮에 돌보는 환자까지 200명이 넘는 환자가 너무도 평안한 가운데 병원의 까운이 아닌 자신의 평상복을 입고, 그림을 그리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새를 키우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꽃을 가꾸거나, 호스피스 병원의 애견인 세퍼트와 함께 자신이 하고 싶은 취미 생활을 하며, 좋은 것은 아니지만 애연가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체스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자기가 먹고 싶은 모든 것에 자유(?)함을 갖는 그들의 환자에 대한 삶의 가치가 우리와 전혀 다른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환자들은 신부나, 목사들의 영적인 돌봄을 받기도 해서 그렇겠지만 모든 환자들 표정에서 말기환자로서 죽음의 두려움이 아니라 영원한 소망이 넘치고 있었다. 호주는 경제의 활성에 힘입어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 바빠져서 이젠 자원 봉사자가 극히 적단다. 자원 봉사자 수효가 적은 대신에 국가에서 년 1000만 달러 이상의 예산으로 모든 환자를 무료로 돌볼 수 있도록 전문인 사역자로 주로 환자들을 돌본다. 호주의 이 시설과 섬김을 돌아보며 우리는 언제나 연약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투자가 이수준에 이를까를 소망하며 기도하고 또 우리에게 남녀 호스피스로 자원 봉사자들을 허락하셨음에 감사했다. 특별히 호주의 호스피스에서의 강의를 통해 우리의 섬김의 지식적인 면이 검증을 받았다는 면에서 우리 호스피스 봉사자들이 얼마나 기뻐하고 흥분이 되었는지... 그러나 호주는 홀로된 가정을 섬기지 못하고 있으나, 우리는 홀로된 가정을 위해 허락하신 섬김에 감사를 했다. 뉴질랜드로 일정을 바꾸어 오클랜드의 시설 호스피스를 방문하게 되었다. 너무도 신선한 공기와 지상의 마지막 남은 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름다운 산하를 보면서 은근한 흥분을 감추지를 못했다. 그 곳의 시설은 우리가 사는 집과 같은 크기의 주택이었다. 방이 3개인 작은 집이었다. 침대는 6개가 있었지만 주변은 온통 꽃으로 뒤엉킨 그러면서도 조화를 이룬 평안한 위로의 집이었다. 뉴질랜드는 환자를 돌보는 데 사용하는 기저귀까지 국가 예산에서 지급을 해준다. 봉사자는 스텝진을 제외한 거의 모두가 자원 봉사자로 활동하되 2명이 한 조가 되어 24시간 전천후로 환자를 돌본다. 밤에도 위급하다면 어디에서나 30분 이내 도착할 수 있는 기동력을 갖추고 있다고 은근한 자랑(?)을 하기에 나는 속으로 말했다. 우리는 언제나 5분 대기조인데요 뭘. 우리는 엄청난 도전을 받았다. 마침 아는 분을 만났다. 뉴질랜드에 이민올 때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아 이곳 호스피스에서 3개월 정도 돌봄을 받았고 부인을 먼저 보낸 J선생님을 만났다. 먼저 간 부인이 생각나서 오클랜드 시설 호스피스 지역을 5개월간 일부러 발걸음을 끊었던 J선생님은 호스피스 봉사자를 천사라 부른다. 그는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시작한 지 일주일 밖에 안된 사업도 잠시 쉬고 뉴질랜드 호스피스에 대한 보고를 고국에서 온 호스피스 천사들에게 들려 주기 위해 자청하여 안내한다. 한 시간 이상 자신이 받았던 뉴질랜드 호스피스의 보고를 들려 주실 때 우리는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간증을 통해 이곳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비전을 주고 계셨다. 이곳에서는 홀로 된 가정을 1년간 얼마나 아름답게 섬기는지 모른다. 우리가 2년간 섬긴다고 은근히 자만했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번 호주, 뉴질랜드의 방문때 우리를 안내하신 현지 집사님은 매우 놀라워 했다. 이곳에 온 지 20년만에 처음 느끼는 충격이라고 고백하면서 관광에는 관심없고 오직 환자를 위해 관광을 포기하는 미친 사람들, 별난 사람들을 만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을 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행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마지막 밤을 보낼 때 모두가 하나같이 이렇게 간증했다. “일생동안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후회하지 않고 호스피스 봉사자로 충성하겠습니다!” 우리에게 기도의 제목이 생겼다. 우리에게도 그린벨트에 묶여 있는 집을 한 채 주소서. 나무들이 있는 그곳에서 환자들이 마지막 쉼을 얻을 수 있고, 우리가 그들을 잘 섬길 수 있도록...... 25. 4년간의 병실 간병 색색거리는 산소 호흡기, 호흡을 보조하고, 가래를 뽑기 위해 수술해 놓은 목에서 들리는 끓는 듯한 파열음. 창밖으론 벌써 두 해 반이나 피고 지는 목련, 라일락 그리고 진홍의 철쭉들, 이것들을 시린 눈으로 주시하는 강 혜봉씨의 눈망울엔 철쭉꽃의 그늘이 진다. 90년 12월 8일. 조립식 주택을 설계하던 남편이 무리한 작업과 과로로 인하여 쓰러졌다는 급보를 접한 후 오늘까지 J병원 717호에서, 단 하루도 집에 가본 적도 없이 남편의 병상을 지키고 있다. 우리의 귀와 눈으론 도저히 들리지도, 볼 수 없는 말과 행동을 용케도 알아듣고 본다. 두 해 반, 자신의 의지로는 손가락 하나, 발 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남편을 위해 온전히 손가락, 발가락 되어 주고, 좋고 싫은 표현 한번 할 수 없는 남편을 위해 그의 대변자 노릇을 한다. 다락방 성경모임에 참석하여 귓전으로 들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는 온전히 주님으로 모셔 들인 후, 하루 하루를 하나님의 은혜라 감사하며 그 말씀을 남편의 귀에 들려준다. 간절히 기도하므로 어느날인가부터 남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만 들어도 눈물을 흘리며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여 아무 것도 볼 수도 나눌 수도 없던 남편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그 마음에 소원을 간구하게 해 주었다. 이런 일련의 일로 인하여 담당의사 선생님들에게 하나님이 진짜 살아 계신 분이신 것을 확인하게 불신자 의사 중 몇 분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 나기도 했다. 큰딸 경아가 중학 2년 때, 둘째 수원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병원으로 기거를 옮긴 후 지금은 고2로, 중학 3년으로 크게 잘 자라 주는 것만도 감사한데, 둘 다 반장으로 학교에서 모범을 보이며 모든 면에 탁월하여 칭찬이 자자하다. 지난 달 큰딸 담임 선생님이 면담을 요구하셔서 엄마가 처음 학교에 찾아갔다. 경아는 글짓기에 밝히기를 처음에는 아빠, 엄마를 원망하고 바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 엄마가 믿는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한단다. 그렇게 불편한 몸으로 누워 계시는 아빠와 믿음을 지키는 엄마를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쓴 글의 진위를 확인한 총각 담임 선생님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경아 엄마는 그동안 들어가 보지 못한 자신의 집을 들러 볼 기회를 가졌는데 살림을 줄인다고 이사를 해버려 자신의 집을 찾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 한다. 병실에 들른 나를 보고 “목사님, 하나님 아버지가요 나의 이런 고통을 이렇게 자녀들을 통해서도 위로하여 주셔서 너무나 감사해요. 오늘 또 큰아이가 장학생이 되었다고 소식이 왔어요.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될지요. 비록 우리 남편이 깨어나지 못 한다 해도 감사해요! 천국에서 모든 식구가 함께 예수님과 만날 수 있으니까요.” 신부전증의 합병증이 와서 퉁퉁 부어 오른 환자와 그래도 꿋꿋이 감사하며 그 남편을 간병하는 강 혜봉씨를 뒤로 하며 한 가족을 위한 우리 주님의 보살피심을 감사한다. “여보, 당신과 우리 아이들과 우리 주님을 사랑해. 그리고 감사해라는 고백을 남편으로부터 듣고 싶습니다. 주님 허락하여 주십시오!” 부인은 간절히 기도한다. 26. 봉사자들의 온전한 헌신 K집사님의 유달리 예쁜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자신이 도움을 주어야 하는 환자에게, 이번 주간 딸의 감기가 몹씨 심하여 더 열심히 도와 주지 못하였다는 것 때문에 무척 마음이 아프다. L권사님은 자신이 맡은 환자의 아픔과 고통이 자신의 것 인양, 두 주간 이상 깊은 몸살을 겪으시고 초췌한 모습으로 그 고통을 말씀하시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신다. H권사님은 연세가 70이 넘으셨는데도 젊은이처럼 환자 가정의 살림까지 정리해 주시고, 매일 환자분의 영적인 갈등을 상담해 주시고 말씀을 전하시느라 노구를 이끌고 다니시면서도 정성이 모자란다고 안타까워 하신다. J집사님. P권사님. L, C, M, Y집사님. 목요일 오전에 모이는 이상한 눈물의 모임. 교회에서 중책을 감당하시며, 얼마나 바쁜 가정의 일들을 희생해 가며 자원하여 모이는 호스피스 모임.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나같은 것에게 은혜 주셨기에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감사하여 무엇인가 그 사랑을 전하고 싶어 육신의 아픔과 고통으로 한숨과 낙담 속에 지내는 우리 이웃 형제 자매에게 “나”를 드리는 사람들의 모임. L권사님이 맡아 돌보시는 환자의 자녀는 “엄마, 엄마는 권사가 되지 마. 권사가 되면 너무 힘들어. 엄마처럼 이렇게 늦은 밤에라도 심방 와 주길 원하면 가야 되고, 또 환자만 만나야 하잖아!”라는 말을 한다기에 우리는 오히려 기쁜 감사를 느낀다. K권사님은 임종을 준비하는 환자를 위해 며칠간을 병상 곁에 앉아 섬기다 보니 너무나 깊은 정이 들어 임종 때 고통없는 평안이 있었으나, 너무나 아쉬워 오히려 환자 가족 이상으로 몸살을 앓다가 이젠 절대로 환자를 맞지 않으리라 자신에게 약속을 했다. 그러나 오늘 다시 일어나 우리 권사님을 기다리는 환자에게 “나”를 드리러 찾아나선다. 처음 환자를 맡아 심방을 할 때면 환자와 똑같은 증세로 아픔을 느끼고 고통을 받는다. 처음에는 힘들고 고생스러워 말도 못하고 혼자만 끙끙 앓다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영적으로 재충전한다. 그리고 맡은 자에게는 충성(고린도전서 4장 20절)이라고 전열을 다시 다듬어 전투를 치르러 나가는 주님의 군대가 된다. 병원 중환자실이나, 격리된 병동에 까운을 입고 들어가 환자를 심방하는 것도 감사하여 서로가 자원을 하여 심방팀이 되기도 한다. J라는 형제는 교통사고로 너무 오래 방치되는 탓에 팔과 다리가 다 굳어 버렸다. 팔은 허우적 되던 상태로, 다리는 가슴에 붙을 만큼 굽어버린 그 몰골을 부여잡고 하나님이 힘 주시길 기도한다. 지난 주간 (5월20일) 15명의 호스피스들이 “한국 자원 능력 개발 연구원”에서 실시하는 10주간의 호스피스 교육을 이수하였다. 더 좋은 양질의 섬김을 위해 애쓰고 힘써 주님의 지체들을 섬기려 한다. “화이팅! 권사님들과 집사님들, 주께서 모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5달런트를 맡은 자로서 더욱 충성된 주의 도구가 되소서. 주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 27. 무의식 속에서의 눈물 정 모형제, 30세. 우리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움찔,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야위어 휘어져 버린 팔과 다리. 가래를 빼내기 위해 수술해 놓은 목에서 계속적으로 들리는 파열음. 10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뼈만 앙상한 몸. 눈은 떠 있으나 전혀 초점이 없고, 입은 벌려져 있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며, 교통사고로 인해 오른쪽의 손상된 뇌로 머리뼈를 수술해 움푹 꺼져버린 머리. 코에 길게 늘어져 있는 호스만이 오직 형제에게 음식물을 투입시켜 주는 생명줄이었다. 이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알지 못했다. 왜 하나님께선 이 형제를 우리에게 연결시켜 주셨을까? 이 형제의 부모는 이미 자신의 아들을 포기해 버린 상태였다. 차라리 쉽게 죽어 주지 않는 아들을 보지 않기 위해 처음에는 기대로, 다음엔 방치하길 1년 이상이나 중환자실에 내어 놓았겠는가. 그러다가 더 이상 병원비를 감당키 어려워 퇴원시켜 버렸다. 퇴원 후 환자를 간병하는 몫은 결혼한 지 2년도 안된 부인과 겨우 한 살도 안된 어린 딸에게 돌아온 셈이었다. 두 분의 호스피스 봉사자가 이 형제를 섬기겠다고 자원을 하였고 우리도 이 형제를 섬기기로 작정했다. 한 형제를 섬기므로 상처받고 깨진 형제의 가정을 구원할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며... 형제에게 처음 복음을 전하던 날 아무것도 알지 못하리라는 우리의 추측은 형제의 눈물로써 깨어져 버렸다. 눈을 깜박거려서 복음의 메시지를 받았다는 응답을 줄 때 우리는 모두 흥분했고, 우리의 기도와 맛사지로 운동을 시킨 후에 부축하여 앉혀 주었을 때, 1년만에 처음 앉는다며 어린 부인은 감격하며 울먹였다. 그런데 부인과 아이가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질 않았다. 친정 어머니가 위독하다며 떠나버린 올케를 그 형제의 여동생은 그래도 이해하려 했다. 이젠 가까운 사람들이 다 떠나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형제의 영혼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다. 오늘도 우리는 그 형제를 찾아간다. 우리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28. 마지막 약속 혹시 어떤 연락이 왔었나? 그런데 전화를 통해 들려 오는 아내의 음성은 상당히 긴박했다. 모든 스케줄을 미뤄 버리고 J병원 11층 입원실 1109호로 달려 갔다. 6시간 전에 심방을 했었는데 벌써 다른 병실로 옮겨 임종을 준비하고 있었다. 2년 전 간암이 발견되고 3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나, 우리가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치료해 주셨다고 그렇게 기뻐했는데 반년이 조금 넘어 다른 부위에 재발이 되었다. 그러나 재발된 뒤 낙심 속에서도 그렇게 믿음으로 잘 견뎠지만 이제는 달려갈 길을 다 달려 주님 앞에 서길 준비하고 계셨다. “J 선생님! 이제껏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을 주님 십자가에 내려 놓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 J 선생님을 맞이하시기에 모든 것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또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J 선생님이 투병 중 가장 잘 부르셨다는 “내 진정 사모하는”찬송을 불러 천국성에 입성하려는 J 선생님을 응원하였다. 이렇게 찬송과 말씀으로 위로하기를 수 시간. 온몸에 끈끈한 땀을 흘리시며 가쁜 숨결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기진하시길 여러번. 힘든 임종을 위해 애쓰시는 J 선생님을 바라 보기에 우리의 마음이 녹는 듯 하였다. 시간은 흘렀다. 지방에 있던 자녀들이 늦은 밤을 헤치고 달려왔다. 아버지를 부르며 “아버지, 우리는 염려 마세요! 엄마랑 우리는 열심히 믿음생활 잘 할께요. 아빠가 계신 천국에서 만날 것을 약속해요! 먼저 가 계셔요! 천국에서 만나요! 아빠! 편히 가셔요! 아빠 약속해요!” 짐작은 했지만 꼭 만나야 되었고, 들어야 되었던 두 자녀의 목소리를 애타게 기다렸던 J 선생님은 이내 평안을 느끼시고 52세의 삶을 접으셨다.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너무 깊어 꼭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떠나고 싶어 안간힘을 다 쓰시고 기다리다, 기어히 만나고야 떠나가는데... J 선생님을 그분께 보내드리고 돌아오는 새벽에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자녀를 기다리시며 문밖에서 애태우며 서 계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그 분의 심정을 오랜동안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자녀들의 음성을 오래도록 애타게 기다리신다. 주님, 저에게 더 충성할 믿음을 주시옵소서. 29. 호스피스 봉사자 남편의 봉사 “여보! 나 지금 출발하려는데 염려하지 말고 기다려요.” “그러지 마시고 시간을 지체한 후 해가 뜨면 출발하세요.” 강 호기 선생님. 강 선생님은 산사나이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였고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정말로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그는 부인 민 권사님이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하면서 선의의 피해를 당하고 있다. 그렇지만 친구들과 모임이 있는 날도 환자를 돌보느라 참석치 못하는 부인을 오히려 위로하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민 권사님이 이번에 맡은 환자는 그가 전에 맡고 있던 다락방의 순원인 유 수연 자매이다. 유 수연 자매는 처음에 가벼운 장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통증이 있어 부랴부랴 병원에서 권하는 대로 수술을 하였다. 막상 수술을 받고난 후, 유 수현 자매에게 대장암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자매는 대장암이란 고통 말고도 너무나 아픈 가정의 문제를 갖고 있었다. 남편은 10여 년 전에 교통 사고를 당했는데 그 후유증으로 온전치 못한 상태에 있다. 또 아직은 부모의 돌봄이 필요한 자녀가 있고, 유 수현 자매의 생활 터전이던 학원 건물마저 부도가 나서 전세금까지 다 날라가 버렸다. 자매에게 대장암은 너무도 빨리 온 몸을 망가뜨렸고 이런 상황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은 계속 되었다. 유 수현 자매를 돕겠다고 민 권사님이 자원하셔서 그와 연결이 되었다. 강 선생님의 활약상은 지난 번보다 더 빛이 나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 되면 환자 곁에서 보살피고 계시는 민 권사님께 전화를 하신다. “여보! 나 지금 퇴근하려는데 내가 그리로 가도 괜찮겠소?” “전 좀 늦을 것 같아요. 죄송해요 먼저 들어가세요.” 벌써 오래 전부터 퇴근 시간마다 반복되곤 하는 전화 내용이다. 어느날 저녁 늦게 자매를 돌보고 들어온 민 권사님으로부터 유 수현 자매가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염려스럽다는 말을 들으신 강 선생님. 다음날 퇴근 후 눈이 많이도 왔었는데 환자 곁에 계시는 부인 민 권사님께 전화를 걸어 왔다. “강원도 홍천의 산사람들에게 유 수현 자매를 위해서 자연산 민물 장어와 자연산 영지 버섯을 주문해 놓았으니 지금 좀 다녀오겠소.” 강 선생님은 눈이 내리는 밤길인데도 홍천을 향해 차를 몰고 달렸다. 새벽 3시에 민 권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막 모든 것을 구했으니 빨리 서울로 출발한다고 하는 내용이다. 한시라도 빨리 환자에게 자신이 구한 것을 먹게 하고 병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눈오는 밤길을 멀다 않고 달려 갔다 오는 것이다. 이렇게 섬겨 주시는 외조자들이 있기에 우리 호스피스 여자 권사님, 집사님들은 마음 든든하게 사역을 펼쳐 나가고 있다. 유 수현 자매에 대한 민 권사님의 섬김과 강 호기 선생님의 헌신은 각별했다. 그리고 모든 호스피스의 섬김과 많은 성도들의 기도 속에서 유 수현 자매는 암의 지독한 고통은 있었으나 풍성한 사랑 속에서 평안을 찾아 주님곁 영원한 본향을 찾아 갔다. 30. 호스피스의 독백 병원에서 의사와 약물을 통해서만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문제. 예수님의 치료 역사와 은혜를 믿기 때문에 오직 기도로만 치료하겠다는 문제. 이것은 우리에게 참 어려운 결정을 요구하는 난제이다. 환자 교우들은 언제나 불안과 공포를 갖고 하루 하루를 지낸다. 좀 이상하다 생각되어 병원에 갔더니 암 진단이 내렸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감기에 걸린 것처럼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은 암의 공포가 있다. 환자 중 모두가 다 안타깝고 마음을 졸이게 하지만 특별히 뛰고 또 뛰어도 젊음이 터지는 아이들, 눈부실 만큼 예쁘고 아름답게 자라야 할 어린 아이들이 알게 모르게 공포와 불안에 질려 어른들의 눈치나 살피고 있을 땐 더욱 가슴이 미어진다. 암이라는 통보가 오면 예외없이 항암제를 맞는다. 암 세포를 죽이고 치료를 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지만 너무도 많은 희생을 가져온다. 주사를 맞는 순간 고통이 시작된다. 그렇게 탐스럽던 머리칼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빠져버린다. 주사를 자꾸 맞을수록 백혈구 숫자는 감소되어 더욱 몸의 저항력을 떨어뜨린다. 구역질과 토함은 오장육부를 온통 뒤집어 놓고야 만다. 이것만이랴! 계속되는 투병은 얼마간 모아둔 재산이란 것도 다 없애 버려 필경은 빚더미에 앉는 경우도 종종 있다. 환자가 가장이었다면 일은 상당히 심각하게 돌아 간다. 남겨진 사람과 빚, 그리고 그 아픔을 누가 위로하겠는가. 그나마 치료를 잘 하고 완치가 되었다면 얼마나 소망과 기대에 벅차겠는가! 그러나 모든 일이 간구대로 되어 주길 바라는 기대는 별로 할 수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다. 처음 호스피스 사역을 시작할 때는 호스피스라는 용어 자체도 생소한 때였다. 환자들을 신앙과 믿음으로 섬기면 저들이 주님과 함께 투병하며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으리란 순수한 사랑에서 출발을 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지금의 자리까지 와 버렸다. 우리는 가끔 자신이 전혀 한 것이 없는 것 같은 무기력을 느낀다. 그렇지만 이 무기력한 것 같은 일에 매달린 남자 자원 봉사자가 15명, 여자 자원 봉사자가 120명이나 된다. 그들은 오늘도 “호스피스 사역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하지요?”라고 하며 진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곤 한다. 남자 호스피스는 이른 아침에, 여자 호스피스는 오전 중에 모이는데 기도회와 환자 돌봄 상황보고가 열리는 시간에는 너무나 진지하다. 우리의 현장은 비록 고통과 질고 속에 있지만 우리의 돌봄과 섬김을 통해 환우들이 변화되는 열매를 보고할 때는 너나 없이 감사하며 감격해 한다. 한 생명을 새롭게 얻는 감격과 기쁨이 있다. 우리는 기도를 요청한다. 첫째: 남,녀 모든 자원봉사 호스피스들이 성령충만하여 기쁨으로 더 잘 환우를 돌볼 수 있게, 둘째: 언제나 말씀의 능력으로 이 일들을 감당하되, 모든 섬기는 자들의 가정이 언제나 모든 것에 부족하지 않게, 셋째: 사역을 하다가 받게 되는 아픔에서 빨리 빠져 나올 수 있길, 마지막으로 어려움에 처한 환우들의 가정이 당하게 되는 영적 침체와, 물질적 부족을 주님이 다 메꾸어 주시도록... 31. 어느 유학자의 병상 세례 영정 앞에 놓인 고인의 성경책은 무엇인가 조금은 우리의 성경책과 달랐다. 펼쳐진 성경은 잠언서 3장 5절-7절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말씀 아래 밑줄이 그어져 있고, 성경의 각책을 빨리 찾기 위해 색인표는 일정한 간격으로 붙어 있고 그 표위에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달필로 적혀 있다. 환자는 68세로 담낭암이 간과 여러 곳에 전이가 되었다. 유교의 오랜 전통과 배경을 가진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인데 정년으로 퇴임하셨다. 윤 선생님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대쪽같은 성품의 소유자이다. 어느날 말할 수 없는 통증으로 병원을 찾았으나 서울의 더 큰 병원을 찾아야만 했다. 자제분인 윤 집사 내외는 병원의 진단 결과 소식을 듣고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육신의 질고는 지금까지 아버님이 쌓아온 모든 것을 실패로 만들 것이라고 윤 집사님 내외는 생각했다. 그래서 영원한 심판 가운데 고통 당하실 아버님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심판은 면제받고 모든 것을 회복하실 수 있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도저히 우리 아버지만은... 하였던 두려움은 사라지고 윤 선생님은 병상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셨다. 처음 병원에 심방을 했을 때 고통 속에서 약간은 귀찮아 하셨으나 의연함을 잃지 않으셨던 윤 선생님은 얼마 가지않아 병상 세례를 요청해 왔다. 94년 3월 24일 밤 8시에 세례를 위해 준비하고 그 가정에 도착했다. 가족과 자녀손들이 온 집에 가득하였다. 찬송가 82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찬송을 부르실 때 윤 선생님은 흐느끼기 시작하시더니 큰 통곡을 하시며 신앙을 고백하셨다. 할아버지의 회개와 기쁨의 눈물을 본 온 식구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병상세례를 마치고 나올 때 왜 그리 하나님의 사랑이 벅차 올랐는지 참 감격스럽고 감사하였다. 얼마후 세례를 받고 내친 김에 기도원에 얼마간 가서 계신다고 하는 가족들의 연락이 왔다. 기도원에 계신 2개월 남짓 성경의 색인표를 만드셨고, 신약은 통독을 하시고 구약은 지금 영정 앞에 펴놓으신 곳까지 통독하셨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고통과 통증 중에도 여러 기도문을 써놓으셨는데 당신의 고통보다는 그 기도원에서 만난 다른 젊은 환자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해 주시며 고쳐 주시길 참 간곡하게 써놓으셨다. 윤 선생님의 병세는 6월 말이 되자 악화되어 혼수상태가 왔다. 병상을 찾은 우리의 마음은 더욱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을 간구했다. 마지막까지 성경을 다 통독하실 수 있게... 혼수상태에 빠져 계시던 7월 3일 갑자기 깨어나셔서 “아! 예수님이 정말 살아계시군요!”라고 3번이나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자녀들의 확인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하시고 그날 밤에 다시 혼수상태가 되어 7월5일 아침 7시50분에 온전히 깊은 잠에 빠져 드셨다. 장례를 인도하면서 나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아쉬움은 기쁨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지금껏 전통과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살아온 그 긴 날보다 비록 몇 개월의 짧은 주님과의 삶이었지만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그 기쁨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 밑줄이 쳐진 성경을 대할 때 표현할 수는 없는 묘한 기쁨을 느끼는 것은 고인과 가족에 대한 무례가 아니리라. 32. 6년만에 부르는 찬송 ...목...쌰...닝...! 심방을 위해 들어서는 나에게 들려오는 천사의 첫 마디 말이다. 왕눈에는 눈물이 반짝이고, 입은 벌릴 수 있는 한 크게 벌려 함박 웃음을 머금고, 온 몸에서 움직일 수 있는 오른쪽 손목만이 어그러진 채 까딱인다. 이렇게 무너져 누워 있는 동생을 7년 넘게 떠 먹여주고, 매일 목욕을 시키고, 대소변을 처리해 주는 언니가 거든다. “영옥이가 얼마나 시계만 쳐다보고, 문만 쳐다보고 있었는지 몰라요. 어쩜 저렇게 좋아할까!” 7년전 불의의 습격를 당하여 머리를 너무나 심하게 다쳤다. 생명의 위독함을 알리는 연락을 받고 일본에 건너간 언니가 급히 돌아 왔다. 그의 눈에 동생은 말할 수도 없고, 손발도 쓸 수 없는 식물인간처럼 되어 있었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시한부 인생으로 불구가 된 동생과 병원비 청구서 뿐이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으로부터 큰 낭패를 보고 절대로 교회에는 나가지 않으리라 작정하던 언니가 친구들의 딱! 한번의 권유로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된 김 영옥 자매. 그는 우리 호스피스들에게 찬송 잘 하는 천사로 통한다. 처음 심방 때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찬송을 부르자 환자는 사고를 당하기 전 일본에서 잠깐 나가던 교회생활이 기억이 나는 양, 6년 만에 그 큰 왕눈을 껌벅거리며 잘 발음 되지 않는 입을 움직이며 찬송가 102장「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전부를 기쁨으로 찬양한다. 이땐 채워져 끈적거리는 기저귀도 아랑곳 없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누워만 있었으니 거무티티하고 흐물흐물 욕창이 생겼는데 아픈 등짝도 아랑곳 없었다. 너무나 큰 평안을 누리는 자매를 볼 때 그는 천사였다. 호스피스 봉사자들은 보고회와 기도회 때 한결같이 자매의 안부를 물어본다. 기도와 말씀과 찬송으로 만져주고, 쓸어주고, 운동을 시켜주니 “자매가 놀랄 만큼 변했어요! 이대로 가면 금방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꼭 자매를 일으켜 세워 주시길 원해요.” 기뻐하는 우리에게 걱정이 생겼다. 간호하는 언니의 몸이 많이 소진하여 걱정이 되는데다가 물질적으로도 여간 어렵지 않으니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 요양소를 알아 보나 받아 줄 곳도 없다. “이럴 때엔 주님! 우리는 저들을 어떻게 섬겨야 되나요? 고통 속에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저 천사들을...” 지금 자매는 그동안「샘물 호스피스」를 거쳐, 어느 여자 장로님이 맹인들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집을 소망의 집으로 드리고 헌신하시는「소망의 집」을 거친 다음,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꽃동네」에서 섬김을 받고 있다. 자매는 가끔 면회가는 우리를 기다린다. 찬송가 102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찬송을 함께 부르는 기대를 갖고 기다리고 있다. 33. 병동의 영적 전쟁 S병원 중환자실. 온몸에 칭칭 감긴 주사약의 호스가 조그만 몸을 억매고 있다. 왜 저 아이는 온종일 뛰기에도 하루 해가 모자랄 터인데 저렇게 몸부림을 쳐야 하나? 눈에 밟히는 아이, 아직 채 피기도 전에 무너지는 저 조그마한 몸뚱이. 혼자 항암제를 주사 맞고 너무나 고통스러워 몸을 둥그렇게 구부리고 고통 속에 언제일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간병을 기다리는 불쌍한 아이. 가난하고 불신앙의 부모로부터 방치된 저들을 눈이 시럽게 기억한다. 아픔과 고통이 몰려 오면 이것이 귀신들에 대한 정성이 부족한 탓이라고 여겨 저들 부모는 용한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인다. 저 불쌍한 영혼의 행진을 가슴이 아프도록 되돌아 본다. 급한 심방 요청이 왔다. 호스피스 자원 봉사자와 한참 시간을 잊어가며 병원에 도착하니 환자의 형수가 우리를 맞는다. 얼굴이 긴장 되어 있다. 심상치 않은 마음에 결론을 내렸다. 시어머니께서 시주하시는 절의 승려들 둘이 와서 심방(?)을 하고 있단다. 그들의 심방(?)이 끝나길 대기실 의자에 앉아 적지 않는 시간을 기다렸다. 묘한 영적인 대결을 느끼며, 병실에 올라갔는데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것 같은 고통스런 형제를 만났다. 그의 고통을 맞는 우리의 심정은 너무도 착잡하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에 저의 갈 길을 안타까워하여 시어머니의 눈을 피해 우리를 부르신 환자의 형수되시는 집사님. 그의 애타하고 조마 조마한 심장의 고동소리가 우리 귀에 너무도 크게 느껴진다. 우리는 내심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집요하게 할 수 있는 한 몇날을 총공격하였다. 형제는 고통 중에도 복음을 들었다. 그리고 고백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지막 임종의 시간에는 모든 식구가 그 형제의 곁을 떠나 있었다. 오직 형수되시는 집사님만 곁에 있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마지막 임종 때도 천국과 찬송의 영접 속에 그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큰 소망을 주신 기도의 제목은, 찢기고, 버려지고, 질병에 팽개쳐진 저 영혼들을 위해 간구하라는 것이다. 한 명의 환자를 통해 전 가족을 구원할 수 있도록... 그리고 홀로 남은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회복되고 기쁨의 찬양을 함께 드릴 때 모두가 하나가 되기를........ 그래서 이제 우리 호스피스는 병원 선교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준비되어진 자들에게는 피곤과 곤비함을 멀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을 잘 알고 있기에..... 34. 나의 어린 왕자 태경이네 식구는 아빠, 엄마, 그리고 여동생 둘, 다섯 식구가 산다. 현재 태경이는 14세이다. 태경이는 피부가 너무나 곱고, 얼마나 어여쁜지 보기에도 눈부시다. 태경이는 찬송을 너무도 좋아하고, 함께 기도하기를 그렇게도 좋아한다. 그러나 태경이는 어릴 때 아빠의 직장을 따라 일본에서 살았다. 세 살 때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아장거리던 걸음이 물이 채워진 수영장을 걸어들어가 그만 빠져 버리는 사고를 당했다. 없어진 아들을 찾아 이리저리 헤메던 엄마가 태경이를 발견한 것은 수영장 바닥이었다. 발견할 당시 태경이는 산소를 너무 오래 공급받지 못해 거의 절명 상태였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 치료기관에서도 어차피 치료가 불가능하니 태경이를 포기하라고 종용했다. 그렇지만 부모는 자식을 포기하지 못했다. 태경이에게 할 수만 있다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드려서라도 태경이를 깨어나게 해야 될 것으로 믿고 투병을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소원하며 매달렸다. 태경이는 학교가 어떻게 생긴지 잘 알지 못한다. 물론 친구도 한 명 없다. 그는 듣기는 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지금껏 엄마라는 말 한마디도 해보지 못했고,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예쁜 눈을 가졌기에 더욱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태경이는 1년이면 거의 많은 시간을 병원에서 지내지만 어떻든 가정에서 그의 위치는 언제나 병실 침대에 붙어 있는 환하게 웃는 개구장이 어린 왕자로서 확고하다. 동생들은 언제나 오빠를 위해 학교에서 일어난 일, 친구들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그러지고 휘어진 팔 다리를 주물러 주고, 오빠를 위해 기도해 준다. 우리가 태경이를 만난 것은 벌써 6년이 넘어 7년이 다 되어 간다. 태경이를 처음 만났을 때 마음대로 휘어져 뼈밖에 없는 팔 다리가 안타까웠다. 이 아이에게 무엇을 한들 아이가 알아 들을 수 있고, 반응이나 할까? 그런데 그것은 기우였다. 찬송을 불러주고, 기도를 해주자 간난아이처럼 좋아하며 벙긋벙긋 미소짓는 얼굴. 그의 엄마는 10년이 넘는 동안을 엄마라는 말 한마디 듣기 위해 간호해 왔다. 깨어나면 꼭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기 위해 일본에 선교사가 되기를 소원하는 믿음의 이 집사님, 고 집사님. 어느 누가 이들의 아픈 가슴을 이해하고 위로해 줄 수 있으랴! 그래도 두분에게는 감사가 있고, 소망이 있다. 10여 년이 넘는 병상을 지켜 오면서 소망없을 것 같은 현실을 예수님 때문에 그래도 감사할 수 있고, 소망을 위해 오늘도 투병할 수 있음에 오히려 우리는 큰 능력을 보며 도전을 받는다. 그렇지만 매일 매일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태경이의 투병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냥 “하나님 저 아들 좀 봐 주세요! 저 아들이 엄마를 부르며 일어날 은혜를 주세요” 그러면서 서 있을 뿐이다. 언젠가 꿈을 꾸었다. 태경이가 엄마와 함께 나를 찾아와 속삭인다. “목사님, 우리 엄마 예쁘죠? 저는 엄마, 아빠를 무척 사랑하거든요. 나 어때요? 우리 함께 달려 봐요!” 이것이 진정 나의 헛된 소망일까? 갑자기 전화가 왔다. “태경이가 계속 토악질을 하고 너무 너무 고통스러워 하는데 목사님 어떻게 하죠?” “주님! 어떻게 해야만 절규하는 부모들을 편안케 하시겠습니까? 주님! 어떻게 해야만 몸부림치고 고통받는 저 아들을 편안케 할 수 있습니까? 저희는 손, 발이 있어도 아무 것도 사용할 수 없기에 주님의 은혜를 바라봅니다.” 이제 우리와 오랜 시간을 지내다 보니 태경이는 이 집사님, 고 집사님의 아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아들이 되었다. 나에게 태경이는 어린 왕자로 오늘도 미소를 통해 아름다운 사랑이란 소식을 전해 준다. 찬송을 듣고 즐거워하는 어린 왕자 앞에서 하나님의 기쁨과 위로의 소식을 듣는다. 찬송 542장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뵈었으니 그 꿈 이루어 주옵소서” 찬송을 부르며. 35. 전 미다의 투병 검사를 받기 위해 옷을 걷어올린 자매의 팔에는 소나무의 뿌리같은 흉터가 온 팔에 선명하다. 30세의 나이라면 한창 삶의 기대와 비젼을 세우느라 얼마나 분주하랴. 그러나 자매는 자신에게 맡겨진 삶의 시간 동안 지루하고 피곤한 투석을 기다리며 산다. 전 미다 자매는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게 되었다. 소아마비로 장애를 얻은 것만도 그녀에게는 감당키 어려운데 패혈증으로 사경을 헤매다 청각을 잃게 되었다. 자매의 고난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신장이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여 이제는 일주일이면 두번씩 살아가기 위해 혈관을 찾아 주사바늘을 꽂고 피속에 들어있는 노폐물들을 제거하는 투석을 한다. 이 자매를 섬기기 위해 호스피스 자원 봉사자들 두분이 자원을 하셨다. 봉사를 위해 찾아간 첫날부터 호스피스들 마음에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밀려왔으나 그래도 위로가 있었다. 거의 모든 장기 환자들의 삶이 어렵고 힘든 것은 말할 수 없으나 이 가정에는 같은 소아마비 장애를 갖고 있는 남편의 지극하고 자상한 사랑이 있었다. 호스피스 봉사는 시작되었다. 물기가 많은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는 자매는 매일 가능한 적게 건빵이나 빵으로 연명을 한다. 자매를 섬기는 호스피스 봉사자 하 집사님은 자신이 지난해 신체검사를 할 때 의사 선생님의 판정의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시 그 마음을 때렸다고 한다. “특별히 신장이 건강하군요!” 하 집사님은 조심스럽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자매를 위해 자신의 신장을 기증하라고 하신다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자매는 생명을 찾은 양 감사했고, 자매를 치료하시는 담당 의사 선생님은 오직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장기를 오히려 감사함으로 기증하겠다는 그 사실에 믿을 수 없는 충격을 받고 최선을 다하자고 약속한다. 호스피스 하 집사님의 남편 한 집사님은 자신의 부인이 신장을 기증하겠다는 결단에 큰 도전을 받고 남자 호스피스로 결단하고 훈련 중이시다. 여러번의 검사를 거쳐야 기증의 적합 판정이 난다. 검사 과정에서 두 사람이 너무도 잘 맞아가고 있다. 검사를 위한 새벽. 병원의 검사실에 환자와 남편, 호스피스 봉사자와 병원의 검사자들 모두의 마음은 모두 내 맘과 같았으리라. 표현하기 어려운 뿌듯함과 감사와 그리고 더 큰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고 계심을 느꼈다. 전 미다 자매는 신장이식을 위한 예비단계로 그동안 사용이 불가능한 방광을 인조 방광으로 바꾸기 위해서 치료 중이며 매주일 남편과 함께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여 감사예배를 드린다. 얼마후 우리에게 낭보가 들려 왔다. 95년 1월 6일 이른 아침. 이식을 위한 수술에 들어 가기 전에 기도를 요청한다. 같은 시간 2, 3분의 시차를 두고 수술실 입구의 복도에서 수혜자인 전 미다 자매와 기증자인 호스피스 봉사자 하 경자 집사님의 침대를 붙들고 간절히 기도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하 집사님의 신장이 전 미다 자매에게 연결되었을 때 얼마 있지 않아 그렇게 신비하게도 그동안 한번도 시원스럽게 할 수 없었던 소변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절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수술이 끝난 후 기증하신 하 집사님은 회복을 위한 또 한번의 고통 속에서도 감사함을 잃지 않았다. 연약한 환자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오늘 전 미다 자매에게 나타난 것처럼 모든 연약한 환자들이 주님께 감사를 돌릴 수 있기를 소원한다. 36. 웬말인가 날 위하여 찌그러진 방이라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들에게 보일까 싶어 가만히 숨어있는 아랫층을 달아낸 움막같은 방. 그속에 비닐 장판과 벽지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밀리기도 하고 우그러지기도 하고 찌그러진채 붙어있다. 마치 이 방주인의 아픔을 대변하는 양... 자신이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가족들의 입막음 때문에 “약을 먹는데 왜 이렇게 아픈지 알 수가 없네”라고 말하는 자매. 그녀의 굵은 앞니가 더욱 커 보이는 안타까움은 왠일일까? 하나님 아버지, 이 고통하는 골수암 자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줄 수 있을까요 ? 자매의 유일한 찬송인 웬말인가 날 위하여...를 몇 번이나 부르며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위로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아픔을 줄여 줄 수 있으랴! 할 수 있는 한 큰 소리로 외친다. 온 방안에 지금까지 쏟아 놓았던 아픔의 고통 소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밀려나 조그마한 창문으로 다 빠져 나가게 복음의 큰 확신을 전한다. 그리고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를 고백한다. 언제부터인가 성도들이 우리를 볼 때마다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인사를 하신다. 그렇게 힘든 일을 어떻게 하시느냐, 나는 도무지 할 수 없을 것 같다. 참 장하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왜 이렇게 답답한지... 우리가 하는 호스피스 사역은 너무도 감격적인 사역이고, 또 너무도 간단한 사역이어서 예수님만 확실히 나의 주님으로 체험되었다면 그외에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환자에게서 예수님이 매일 보여지시기에... 아픔을 호소하던 자매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모든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나 보다. 춥고 바람 부니 나오지 말라는 말에 아랑곳없이 문 밖까지 따라 나와 또 와주길 부탁한다. 돌아서며 자주 오겠다고 대답은 하였으나 마음 한 구석이 무너진다. 저렇게 애타게 기다리는 자들은 너무도 많고 많은데 와서 전하고 격려할 자들은 한정 되었으니 무엇으로 저들을 섬길 수 있으랴...... 어느 환자의 고백이 생각난다. 교회에서 이런 광고를 하고 들을 때는 자신과 무관하여 그냥 바라만 보았더니 이제 자신이 도움을 받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그래서 이제는 회개하는 심정으로 자신이 조금만 치유되면 함께 활동하고 싶다고... 오늘 우리 호스피스에서는 바로 예수님을 만나길 원하시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믿음의 빚진 자들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를 호스피스는 환영합니다. 호스피스에는 중보 기도팀과 중창단이 운영되며 교회의 환자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예수님 모르고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저들을 예수님으로 섬기는 병원 선교팀이 있습니다. 호스피스에는 사후관리로 홀로된 사람들의 모임이「샬롬회」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어 서로의 어려움을 이겨 나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눈을 들어 여유 있게 보십시오. 너무나 섬길 부분이 많습니다. 또 이 일은 여성들만의 전유물도 절대 아닙니다. 자! 이제 망설이지 마시고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정말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섬기는 분들과 섬김을 받아야 할 모든 주님의 자녀들이 바로 내 가족입니다. 37. 한나와 엄마의 투병 부모의 자기 자녀에 대한 사랑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남에게야 그 무게가 얼마나 나갈까마는 부모에게는 말로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가난하고 세상적으로 인정 받을 만한 직장이 집사님에게 없지만 한나는 너무도 소중한 딸이었다. 그냥 탈없이 예쁜 딸로 자라만 주기를 그렇게 기도했고 또 간청했다. 어느날 감기인 것처럼 시작한 고열은 몇날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경기를 해대는지 집사님은 한나를 끌어안고 “하나님 아버지! 살려주세요!” 부르짖고 외쳤을 때 딸은 언제 경기를 했느냐 싶게 깨어 났다. 그리고 쉽게 열도 내렸다. 그러나 안도는 잠깐. 한나는 습관적인 것처럼 눈을 뒤집고, 거품을 내놓으며 쓰러지길 몇번인가 계속하였다. 한나를 데리고 갈 수 있는 한 모든 병원과 의사 선생님을 찾아 다녔고, 쓸 수 있는 약은 다 사용하였다. 집사님의 가정은 오직 한나의 치료만을 위해 6년의 세월을 아끼지 않았다. 정성은 헛되지 않아 넘어지고, 쓰러져서 입에 거품을 물고, 사지를 뒤트는 빈도가 점점 줄어갔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한나를 버리지 않는 징조여!”라며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어느날 집사님은 가슴이 찡하니 전기가 오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너무 피곤한 거야!”라며 잠을 청하던 집사님이 가슴을 쓸어 내리더니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아침을 드는둥 마는둥 한나가 놀라지 않게 해놓고 찾아간 병원에서 선생님은 “아무래도 조금 심상치가 않습니다. 대학병원에 연결해 드리죠.” 대학병원을 찾아갔을 때는 아예 입원을 권하더니 유방암 초기이니 얼른 수술을 해 버리자 한다. 졸지에 까운으로 갈아 입고 배정 받아 들어간 병실의 침대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고통하며, 한나만은 놀라지 않기를 얼마나 애썼던가. 갑자기 입원실에 전화 벨이 울렸다. 다급한 목소리, 부산스런 잡음. 집사님은 직감했다. 엄마를 기다리다 지친 한나가 두려움에 또 발작을 시작했나 보다. 벌써 입원전 입었던 평상복으로 손과 발이 꿰어지고, 병실을 달려 나와 택시를 잡는다. “한나야, 한나야!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택시 속에서라도 뛰어 갈 수 있었으면..... 자신의 유방암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진정이 된 딸을 안고 그 밤에 교회로 나와 주님 발앞에 꿇어 앉은 그를 붙들고 우린 함께 통곡하며 간절히 기도하였다. 아침이 되어 수술날을 받아 놓은 환자가 증발을 했으니 전화가 파발마를 이룬다. 재입원을 하고 수술전 마지막 정밀 진찰을 했다. 심방을 마치고 돌아온 피곤한 나에게 들려오는 녹음된 집사님의 목소리는 감격 그 자체였다. 나도 모르게 “할렐루야! 진정 주님을 찬양합니다.”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울음반, 웃음반 흥분된 목소리로 “목사님! 목사님! 병원에서 수술하지 않아도 된대요, 어제까지 있던 암세포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대요, 정말이에요, 너무 너무 감사해요... 할렐루야!”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한나를 다시 주님께 부탁한다. 그리고 가만히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에 대한 그 사랑하심을 묵상케 하심으로 마음깊이 감사의 찬송으로 기쁨과 안도의 눈물을 돌려 드린다. 연약한 한 엄마의 사랑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랴...... 38. 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의 작은 음악회 91년 11월, 대각성 전도 집회가 끝나갈 무렵. 젊음과 비젼이 있고 그리고 치과 개업 의사로서도 성공하던 자상한 남편. 너무도 아름다운 두 자녀가 있어 아무런 걱정없이 앞만 향해 끊임없이 달려 가던 가정. 찬송을 좋아하며 여리기까지 하며 아름답기만 하던 박 집사님 가정. 언제부턴가 6개월마다 받던 정기검진을 통해서 건강에는 아무 염려가 없었던 집사님은 지난 마지막 검진후에도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왠지 약간 불안하고 뭔가 의심이 간다 생각했는데 상상도 하지 못하던, 자신에게는 무관할 것 같던 자궁암이라는 선고가 내려 졌다. “아! 나의 인생은 이제 끝났구나.” “내가, 내가 암이라니 초기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알아!”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정기검진을 받았는데 왜 검진 때는 발견하지 못했다는 거야 !” “하나님! 왜 접니까? 왜 저야만 합니까? 왜 그 무시무시한 암이라는 질병이 하필 나에게 생겨야 합니까?” “난 제 정신으로 도저히 이 질병과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연약한지 아시잖아요. 이 암을 어떻게 싸워요? 이 암이 점점 나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데 나는 무서워요. 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려 그렇게 노력했는데 왜 저에게 이런 무지막지한 형벌이 내려져야 합니까? 왜?” 아름다운 꿈이 아롱아롱 매달렸던 가정에 분노와 우울의 슬픔과 몸부림이 들이닥쳤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고통의 문으로 들어서는 투병이 시작되었다. 수술하기에는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항암제를 1주일에 3차례 맞았다. 그리고 나서 수술을 해야 한다는 주치의 선생님의 진단을 받고 말로만 듣던 항암제의 고통이 너무 무서워 집사님은 고통했다. “차라리 기도원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매달려나 볼까? 그래도 혹시나 하나님이 그동안 나의 삶을 보셨으니 나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을까?”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도 자신이 서질 않았다. “그렇다면 의사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 무서운 치료를 받아야 하나?” 갈등 속에 박 집사님의 팔에는 주사 바늘이 꽂혔고 가느다란 집사님의 핏줄을 통해 항암제의 독한 주사약은 온 몸을 삽시간에 정복하고 말았다. 매일 지겹게도 주사를 맞다시피하니 항암 주사를 맞는 혈관은 계속 터져 버리고... 주사를 맞은 몇시간 후부터는 모든 장기는 뒤집히는 듯 구역질이 솟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입은 다 헐어버려 무엇이든지 먹어야 이 악한 암과 싸워 나갈 텐데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고 오히려 올라오는 것은 창자를 끊을 것 같은 고통의 헛구역질. 몇날이 지나자 몰골은 너무나 형편 없어지고, 그렇게 염려 하던 머리칼은 한 웅큼씩 빠져 나가 버렸고 거울을 피하려고 눈을 감아야 했다. “내가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래 죽자! 그러나... 오 하나님 ! 이제 겨우 여섯 살, 아홉 살인 어린 자식을 두고 어떻게 죽습니까? 아버지 살려 주세요, 아버지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호스피스 팀과 연결된 집사님은 나날의 투병을 영적인 승리로 장식해 나갔다. 오히려 찾아오는 호스피스 팀을 위로하시고 힘을 불어 넣어 주시는 집사님이셨다. 그날 심방에 약간 지쳐 집사님을 뵙고 돌아 가려는 날 막무가내로 주저 앉히시더니, “목사님 잠깐만요! 지친 목사님을 위해 찬송 한 곡 불러 드릴께요. 요즘 우리가 계속 부르며 은혜 받는 찬송 중에서 우리 아이들과 함께 부르겠어요.” “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새 힘을 새 힘을 얻으리로다. 독수리 같이 날개를 치며 높-이 높-이 푸른 하늘 날으네, 뛰어가도 고단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네” 갑자기 열린 중창의 작은 음악회, 현재의 집사님의 투병의 간증이었다. 항암제 후유증과 수술 후의 피곤하고 곤한 자신이었건만 “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찬양을 하시던 집사님 그 찬양은 지금도 내가 가장 애창하고 부르기에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충분한 감동과 감격을 주었다. 계속되는 치료에도 별반 차도가 없자 재발이라는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던 집사님. 결국 하나님과의 담판이 아니면 내 영혼이 내 육신보다 먼저 죽겠구나. 내가 이래선 안되지. 이대로는 견딜 수 없어! 집사님은 작정 기도를 결심하고 교회의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로 부르짖었다. 회개할 것을 하나 하나 회개하고, 통곡하고 부르짖을 때 어느 순간 집사님 마음에 놀랄 만한 평안이 찾아 왔다. 요한복음 14장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제 우리 박 집사님의 고백은 “하나님, 내 모습 이대로 감사합니다! 정말 나의 이 고난은 축복을 예비한 문이었습니다.” 한동안 발바닥에 감각이 없고 약간의 부자유스러운 후유증이 있지만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의 때에 완치시켜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할 때 집사님은 6년이 지난 지금은 완치가 되었다. 집사님의 아름답게 자란 머리를 바라보면서 “집사님, 내가 머리칼 한번 만져 보자!” 할 때 집사님은 스스럼 없이 머리를 디밀어 주셨다. 집사님의 머리칼을 만져보니 부드럽고 새털처럼 포근한 촉감은 집사님을 보는 것 같았다. 집사님은 현재 성가대로, 또 교회의 모든 훈련을 다 받고 연약한 다른 영혼을 위해 섬기시며 예전처럼 밝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회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분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