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5 오늘도 감사하셨나요? “저도 건강할 때는 걷고, 서는 것 그리고 앉고 하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를 모르다가 이렇게 7년째 신경골수성 다발성 종양을 갖고 투병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할 수만 있다면 예전의 건강했던 때로 돌아가 하루하루를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지겹다 할 정도로 그저 감사하다고만 말하며 살고 싶습니다.” 건장한 키에 준수한 얼굴을 한 형제의 이런 고백 속에는 너무나 평범한 진리가 숨어있었다. 그는 원래 우주과학에 관심이 많아 어릴 때부터 그 찬란한 우주를 마음껏 날아오르고 싶었던 꿈을 꾸었다. 그리고 대학에서 4년 장학금을 받아 가며 열심히 그 꿈을 만들어 갔다. 최고의 대학원을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그의 품에는 그 넓디넓은 우주도 조그만 그 가슴에 품어 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장래가 총망한 청년이었다. 그렇게 우주의 꿈과 함께 세상을 아름답다고 믿었던 그에게 88년도는 그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광주사태 소용돌이로 인해 망월동 국립묘지에서 눈물짓는 한 아주머니의 눈물 속에서 자신의 삶이 너무나 제도란 굴레에 묶여 세상을 직시하지 못했음을 분노가 폭발하는 계기가 되어 혼란으로 인한 끝날 것 같지 않는 방황이 시작되었다. 깊은 방황 속에서 허탈한 마음을 잠재우려 뒤척이던 성경책 로마서 1장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그 날 그 아침은 지금까지 살아오던 날들의 삶이 아니었다. 교회 주변의 들풀까지도, 나무의 잎 새까지도 자신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며 속삭이듯 살랑 살랑 흔들어 주는 풀잎과 나무 가지들의 향연에 모든 것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군에서 입영통지가 나왔다. 신체검사를 받을 때마다 허리 디스크 증상이 있다며 세 번이나 귀가조치를 받았다. 결국 정밀 검사를 위해 받은 MRI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척수 종양입니다!” 이 종양은 결혼을 약속했던 자매가 형제에게 있는 질병의 실체를 알고 나자 세상 사람들보다 더 모질게 상처를 주고 그의 곁을 떠나 버렸다. 형제는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작정했지만 어느 날 자신의 허물을 위해서 죄 없으시면서도 십자가의 중형을 달게 받으며 너를 위해 이 십자가를 내가 짊어졌으니 이제 너의 고단함을 나의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나의 쉬운 멍애를 지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인자하심에 씁씁하지만 그 자매를 용서하기로 했고 그에게서 우울증의 괴로움도 함께 떠나갔다. 2001년 2월이 되어 갑자기 오른쪽 팔에 너무나 큰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 원인은 그 종양이 심하게 자라서 도저히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낙심이 되던지 그렇게 문제가 없기를 기도하며 기다렸는데 그 종양은 목, 경추, 흉추, 요추 등 전신에 퍼져 자라가고 있었으니 기도할 힘도 잃어버렸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 왔건만 억울하여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엎친데 덥친 것처럼 주변에서는 아무래도 형제가 사명 있어 그렇다고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라는 것이다. 지금 투병을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이젠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니 정말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자신에게 신학을 해야 한다는 말은 이해가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질병 때문에 신학교를 가야 한다는 그 말들이 도피성이 되게 하고는 싶지 않았다. 차라리 열심히 돈을 벌고 병을 치료하고 모두에게 떳떳했을 때 신학도하고 목사도 되리라 결단하고 의지적으로 그는 열심을 다해 투병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최선의 삶을 다했다. 2003년 그는 말 할 수 없는 복통으로 인해 고통하다 그 원인이 그 종양이 문제였다는 것을 알았다. 더 이상 수술을 한다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이 병과 믿음으로 싸우고 싶다고 나에게 연락을 했고 우리 기꺼이 그와 함께 싸웠다. 그리고 12번의 방사선과 13시간, 9시간짜리 수술을 여섯 번 이상이나 견디어야 했다. 2005년에는 치료받던 모 병원에서 의료사고를 당해 그동안 수천만원을 드려 받았던 그동안의 수술과 치료가 다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사고를 당했다. 그가 쓴 병상 일기에 “오늘은 목욕을 하며 의자에 앉아 있다 쓰러졌다. 더러운 바닥에 나딍구는 나의 몸을 보면서 아! 나는 일어서지도 못하는 육신을 가졌구나. 비누로 깨끗이 씻으려 했지만 그 많은 환자의 더러운 바닥에 나의 육신이 있다... 그럴지라도 나는 복의 근원이 되고 싶고 나는 축복의 통로가 되고 싶다....중략" 너무 힘들어 분노와 억울함 속에서도 되지 않는 기도를 부여잡고 긴 긴 터널을 그렇게 걸어 우리와 함께 6년을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 못하는 형제를 붙들고 그 마음의 큰 짐이 회복되길 위해 기도했다. 삼년간이나 휠체어가 없이는 꼼짝할 수 없던 그였지만 지금은 한 발 두발 천천히 걷는 걸음 속에서 오히려 분주함에 익숙한 우리에게 느림이란 미학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아직도 다시 수술을 준비하며 병원을 이리저리 옮겨야 되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오늘 무엇을 감사하셨습니까?” 그의 질문에 새롭게 예수님의 부활하신 평강을 발견한다. 0906. 마지막 여행을 다녀와서 섬기는 환자들을 위해 봉사자들과 함께 기도할 때 한 형제에게 급한 마음이 들었다. 부천 형제의 집 앞에 도착을 했는데 119 구조대 엠블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야 이거 뭔가 잘 못된 것 아니야?” 그렇지 않기를 바라며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표시등을 바라보니 방문할 17층에서 깜박이던 불빛을 보며 동행한 동역자와 서로 얼굴을 보며 갑자기 마음과 생각이 조급해 지기 시작했다. 다행이 환자는 의식이 또렷하지만 수혈을 위해 병원으로 급히 후송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침대에 누워 응급 구조대와 함께한 환자가 하는 말이 “이렇게 찾아와 고마워요!”란 말을 남기고 황급히 후송이 되는 것을 보면서 그나마도 잠간 안부를 물을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이삼일 후에 조금 안정이 되면 병원에서 만나자 약속했다. 형제는 아직 사십 중반의 젊은 나이었고, 10살, 8살 아이와 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내가 있다. 위암 수술 후 복막으로 전이가 된 상태에서 삼 개월의 시한부 인생이란 판정을 받았을 때 아내는 남편에게 믿음과 함께 투병할 수 있는 길이 이 길 밖에 없다고 중학교 선생님을 사직하고 그 곁에서 정성스레 투병을 도왔다. 믿음이 없던 형제가 아내의 지극한 섬김과 우리 남자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섬김에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병과 싸우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형제에게 큰 보너스를 안겨 주셨다. 너무나 통증이 심한 고통이 몰려 와 병원 복도를 겨우 걸어갈 때 이럴 땐 예수님이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던 봉사의 말을 기억하고 순종할 때 너무 놀랍게도 그토록 힘들게 했던 통증이 서서히 자신에게서 벗겨지는 것을 느끼며 그때부터는 그 형제 고백은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뿐이었고 그는 이제껏 왜 이렇게 가장 가까이에 자기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거부했던 가를 후회하고 미안해했다. 삼십여 번의 항암제를 맞을 때도, 바뀌는 약마다 다른 형태로 찾아 도던 그 고통의 순간들을 기억하면 금방이라도 자지러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형제의 입에서는 이젠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내 이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나니 얼마나 편안하고 감사하고 평안하지 몰라!” 그의 고백이 되었다. 주관이 너무나 뚜렷했던 사람, 깊은 정의감 때문에 너무나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나”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강작했기에 때로는 세상일이 본인의 뜻대로 되지 않아 낙담도 많이 하고 많이 아파하기도 했던 사람 그 완벽한 성격 때문에 자신의 병이 왔다고 믿던 사람 의사 선생님이 삼개월간의 시한부 생명을 말했지만 근 두해를 더 투병하며 지내 왔는데 이젠 정말 더 이상 쓸 약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나서는 찾아간 봉사자에게 “집사님, 이제 너무 지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대로 떠나고 싶다”던 그때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봉사자의 권면에 자기가 너무 좁은 소견이었다고 다시 투병을 시작한지 사 개월이 지난 오늘 그는 그렇게 또다시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다. 곧 어린이 주일인데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까? 환자는 모든 가족을 데리고 삼박 사일의 강원도 설악산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너무도 아름답고 소중한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아이들이 아빠와 딱 붙어 서로가 떨어지지 않으려할 때 아빠는 그 아이들보다 더 가까이 있고 싶었을 것이다. 할 수만 있었다면 아내와도 더 가까이 있어야만 할 시간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서로가 흡수가 되어 되리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다녀와서는 너무 무리가 되었던가 보다. 찾아 간 봉사자에게 이렇게 만나는 시간이 너무도 행복했다고 인사를 하더라는 것이다. 계속 너무 기다려진다고 했다는 것이다. 바쁜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너무 애씀에 감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날 “찾아주어 고맙다!”는 마지막 인사를 받은 결과가 되었다. 갑자기 형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떠났다고 마지막 여행을 또 떠나버렸다. 어린 자녀들과 아직 젊은 아내를 남겨 두고 떠나면서 그렇게 안부를 걱정하더니 이젠 진장한 평안이 그에게 찾아 왔으니 남은 자들에게도 그와 같기를 기도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배하러 가노니.” (요한복음 14:1-2) 0907-8 나와 아내의 꿈 아침 해가 막 기지개를 펴는 시간 오늘도 조기 체조 모임에 나가려 아내는 서두르고 있다. 지난 해 요만 때 아내는 검진을 받다 암을 발견하고 곧 바로 수술하고 지금도 투병 중이다. 참으로 난감했다. 이십여 년을 암 환자들을 섬긴다고 사역은 했지만 아내가 암 환자가 되었을 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했고 그동안 어떤 누구를 위한 사역이었던가를 돌아보게도 했다. 아 그때 그랬었지, 이렇게 좀 할 것을...! 놀랍게도 돌아본 이십여 년이 아쉬움만 가득한 섬김이었다. 나는 아내의 투병을 통해 섬기는 환자들에게 예전에는 느끼지 못한 좀 더 깊은 동지애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수천 번도 더 말했던 감사의 깊음을 생각하고 더 큰 겸손이 무엇인지도 생각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장 4절~6절) 치료를 시작하는 아내의 손을 붙잡고 함께 선릉 공원을 산책하며 아내에게 외우던 말씀을 토해 주었던 처음 말씀이었다. 아내도 화답을 하 듯 함께 오늘까지 아름답게 투병하고 있다. 환자들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없을까하여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한 잔의 차를 놓고 선곡된 음악 속에서 이렇게 투병하자고 진지한 대화를 하기 위해 열어 놓은 “사랑의 쉼터” 나와 아내의 소원이 깃든 평안과 소망의 분위기를 한껏 띄워 놓은 지하 카페에 예의 조기 체조 모임에서 만난 51세의 뇌종양 환자가 지금 나를 기다리며 와 있다고 전화가 왔다. 5년 전부터 자매에겐 참으로 많은 세상의 변화를 겪어 오고 있었단다. 지쳐버린 듯한 무표정한 얼굴에 항암과 방사선으로 다 빠져 버린 머리카락 대신 씌워진 가발 밑으로 한 마디 마디의 말 속에 눈물과 한 숨들을 쏟아 놓았다. 누구나 꽤 성공했다 말하던 패션 사업은 이제 파산 정리의 단계를 맞고 있고, 가정도 깨어지고 건강도 생명도 병원에선 가망성을 말하지 않는 자매의 고백은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섭고 두려워 아무런 자신감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아내를 만났더니 무엇인가 달랐다는 것이다. 오히려 감사하며 자신감 넘치는 것이 부러웠다고 했다. 삼십여 년 전, 내가 절망 중에 만났던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했다. “두려워 말고 놀라지도 말라 하시며 너를 도와주리라 굳센 나의 오른 팔로 너와 함께 해 주겠고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이사야 41장 10절) 하시던 하나님께서 지금 자매에게도 함께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이 자매를 대신해 예수님께 갖은 고난도 고통도 채찍도 허락하셨으니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모든 두려움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매를 향한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하시는 그 음성도, 자매의 그 무거움 짐을 대신 지시고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선포하시는 그 음성을 듣도록 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지금도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는 하나님”(이사야 40장 29절)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서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게 하시며(고린도전서 12장 3절) 이 모든 것이 확인 되도록 교통 감화 감동하시는 은혜(고린도후서 13장13절) 말씀드리고 우리 인생은 언젠가는 한번 죽음을 맞게 되지만 그 죽음은 우리에게는 실패가 아닌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의 삶, 곧 결혼 때 신부가 남편을 위해 준비됨 모습이요 그 곳에는 슬픔도 눈물도 고통도 질병도 죽음도 없는 영원한 생명만 있는”(요한계시록 21장 1절~4절) 완벽한 삶이 준비되었음을 말씀드리자 갑자기 자매는 감사하며 지금껏 자기를 짓누른 공포가 벗겨졌다고 하루하루의 삶을 오늘도 열심히 투병하겠다며 환한 웃음으로 두어 시간의 만남을 마무리 했다. 자매를 안내해 파란 나무들과 꽃들이 만발한 옥상 정원으로 올라갔다. 자매의 얼굴은 어느 꽃들보다 아름답게, 어느 파란 나무보다 아름답게 싱싱함을 갖고 있었다. 자신 있는 투병을 통해 보란 듯 감사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겠노라 약속하며 이번 중보기도학교에 가서 자신을 그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다 내려놓고 오겠다는 약속에 아무리 숨골위에 붙어 있어 절망을 주었던 종양일지라도 또한 감사함으로 투병함에 감사한다. 0909 이제 편히 쉬기를 원 합니다 한 병원 팀의 팀장으로 아름답게 사역을 감당하시던 권사님이 2006년 2월 1일 전화를 하셔서 “폐암으로 3년 정도 남았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활동을 계속해야 될지 어떨지를 물었다. “당연히 권사님만 괜찮다면 오히려 혼자 투병하시는 것보다 환자를 섬기면서 투병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갖게 될 것”이 다며 몇몇 봉사자 중 현재 투병하며 섬기고 계시는 분들의 투병담을 이야기하며 환자에게는 가장 능력 있게 섬길 수 있는 분이 환자이지만 봉사자인 분들 아니겠느냐며 보란 듯이 이겨 내자고 했다. 내가 갖고 있는 환자 명단은 남녀 구별된 일백여명이 되는 환자 명단과 그동안 우리가 섬기던 환자 중에서 회복이 되어 기도로 관리하는 환자 명단이 함께 있다. 난 권사님이 누가 뭐라 했어도 보란 듯이 환자명단이 아닌 회복된 관리자 명단으로 갔다 후에는 완치 판정을 받은 환자의 명단으로 건너가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암은 권사님을 그렇게 쉽게 놓아 주질 안했다. 권사님은 일백여명의 환자명단 속에 이름이 올라 마지막까지 그 명단을 떠나지 못하고 쉰여덟에 우리 곁을 떠나며 저렇게 영정 사진으로 입관 예배를 인도하는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데 왜 나는 이리도 눈물이 쏟아질까? 아쉬움뿐이다. 권사님은 감사를 통해 여유로운 투병을 할 줄 아시는 분이셨다. 보통의 사람들은 옛날을 생각하며 지금 어렵다고 불평할 일 뿐이지만 오히려 지금 불편하니 옛날이 감사하다는 감사는 어떻게 해야 될 줄 아는 분이셨다. 투병하다보니 그동안 건강에 아무런 염려 없이 살았고, 건강할 때 아무 것도 생각지 못했던 하루하루의 일상사가 그리도 감사하다며 하루하루가 얼마나 자신에게 소중했던가를 얘기했다. 복수가 차올라 배가 불러오니 그동안 맘껏 마셨던 물의 그 시원함에 대한 감사, 호흡이 어려워져 산소 호흡기를 끼고 지내야만 하니 지난 날 아무 때나 숨쉬는 것으로 인해 고민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감사, 친구들과 마음 놓고 수다를 떨고 들어가 한 그릇 밥도 걱정 없이 뚝딱해치울 수 있었던 것도 감사, 자녀들이 아무 걱정 없이 자라서 둘 다 자기 짝을 찾아 결혼할 수 있음도 감사, 특별히 신실한 남편은 자신이 환자가 된 이후에 한번도 손에 물을 묻히도록 놓아두지 않고 언제나 자신을 위해 수족처럼 병간해 주심에 감사, 또,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있어 자신이 영적으로 고갈 될 만하면 어떻게 알고 찾아와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나누고 자신을 도와주려 함에 대해 감사, 내 보기에 하찮은 것들에 대해서도 감사해 하셨다. 같은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가 수술을 한다기에 갔다가 조금 이른 새벽이지만 권사님 병실을 찾았다. 잠에서 막 깨어난 듯 한 손에는 링거 줄, 한쪽에는 통증을 조절을 위해 맞는 주사 줄을 달고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양치질을 도와주겠다고 칫솔을 달라했더니 “앙시랑도 아녀요, 나 혼자도 충분해요!” 그동안 숙달이 되었다며 혼자 잘 수밖에 없는 병원, 병실 기한이 찼으니 다른 병원으로 가던지 퇴원을 종용하는 병원이 조금은 야속하다며 우리가 추진하는 환자 쉼터가 빨리 될 수 있었음 얼마나 좋겠냐며 그때 쉼터에 가서는 자기를 돌봐 달라고 했다. 환자들에게 꼭 도움이 될 수 있는 쉼터의 땅은 구했지만 아직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첫 삽을 떠보지도 못하고 몇 년째 준비만하고 있는 나에게 아쉽고 아쉬운 안타까움 뿐, 쉽게 그 곳에 어서 가자고 그 곳에서 쉼을 갖고 투병하자고 약속도 못하고 떠나보내게 되어 마음이 참으로 심란하기도 하지만, 병실에 있다보니 위로한다고 오는 사람들이 환자에게 “다 하나님의 뜻이지요, 병원에 이렇게 오래 있는 것은 회개가 부족해서 그러니 좀 더 열심히 화개하세요” 하는 사람부터 무작정 믿음을 강조하며 믿으라고 하는 사람들까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들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받고 있는지 모른다고 호스피스 봉사자인 자신이 복도 입구에 책상을 놓고 환자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흥분을 하셨던 것을 기억하면 조금은 미소가 나온다. 권사님은 구차하게 자꾸만 살기위해 아등바등하고 싶지 않고 언제나 주님이 오라시면 다 내려놓고 주님께 가겠습니다 자주 자주 고백했다. “권사님 이젠 정말 편안히 쉬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든 봉사자의 배웅과 함께 그 날 평안한 얼굴로 주님의 영접을 받고 가신 본행에서 다시 만납시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14장 13절) 0910 배달 된 한과 한 상자 스물아홉의 꿈 많던 시절 보기에도 아름다운 믿음 좋은 형제를 만나 많은 주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했다. 그리고 다음 해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멋진 소식이 들렸다. 남편이 신학을 하기로 작정하고 공부를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신학을 마치고 나면 그동안 품었던 꿈처럼 찬양 선교사로서 사역을 감당하고 싶어 했다. 결혼 후 3년 후, 갑자기 자매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연락을 했다. 남편이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란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형제가 낙심치 않고 투병하도록 팀에 연결하고 조심스럽게 섬기기 시작했다. 중보기도가 이어져 나갔다. 자가 골수 이식을 통해 젊은 부부는 얼마나 열심히 투병을 했던지 형제는 생각보다 빨리 안정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마음 졸이던 시간은 이제 평안함으로 잘 회복되어 자신들이 원하던 사역자가 되기를 모두는 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제 우리는 환자명단에서 형제를 과감하게 졸업을 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올 때쯤 자매로부터 남편이 다시 병원 무균실에 들어갔다는 연락이 왔다. 진상을 파악해 보니 형제는 몸이 조금 좋아지고 컨디션이 자신이 생겼던지 자신이 이루겠다 생각하는 CCM 찬양 선교사가 되어질 것 만 같았나 보다.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한 주간동안 내내 오랜 시간동안 노래를 준비하고 또 목청을 가다듬고 하다 보니 무리가 되었던지 일주일 만에 그렇게 다시 병원에 들어가 무균실로 직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숙주 반응(골수이식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거부반응으로 인한 증상)으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것이다. 그동안 결혼을 하고 한 해가 지나 예쁜 아들을 낳았다고 그렇게 좋아하고 기쁨으로 비젼을 이야기 하는 중에 다음 해 남편이 병을 얻고 삼년의 투병을 하다보니 처음에는 그렇게 주변의 사람들의 관심 있던 관심도 떠나갔고, 혼자서만 투병해야 되는 그 아픔과 고립됨이 그렇게 귀엽던 아이까지도 돌아 볼 수 없는 우울증으로 찾아 왔다. 아이가 칭얼거릴 때마다 짜증스럽고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너무 힘들다!”는 말이 저절로 흘러 나왔다. 아직은 어린 엄마로서 아내로서 너무도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자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에 우리가 자매의 울타리가 되어 주기 위해 더욱더 무릎을 꿇어 매어 달려야 했다. 이번 주간은 민족의 명절인 추석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를 빼고는 모두들 바삐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무실 간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와서 보고하기를 자매가 한과상자를 보냈다는 것이다. 왜 받았느냐 했지만 택배 기사가 놓고 가버렸으니 참으로 난감해 했다. 아무리 명절이라도 그동안 우린 대접할지언정 섬기는 자로서 아무것도 대접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는데 참으로 난감하고 어찌 처리하나 고민했다. 자매의 그런 와중에도 보낸 선물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 날, 아내가 농아인인 한 가정이 알콜 중독자인 정상인 아빠의 횡포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 문제로 두 아들과 함께 상담을 하기위해 나를 사무실로 찾았다. 아이들의 두려움에 떠는 눈망울과 그런 아이들을 지키려는 농아 엄마의 눈을 보는 순간 자매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 이런 삶도 있다고, 힘들고 어려워도 이겨 낼 수 있도록 이 가정에 우리에게 보내 준 선물을 대신 전해 줘도 괜찮겠냐 했더니, 자매는 너무나 감사하며 자신이 보내 준 선물이 더 낮은 자에게 새로운 힘이 되었다는 것을 통해 다시 일어날 힘이 되었다는 감사의 고백을 한다. 처음에는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었지만 서로의 사랑을 나누다 보니 자신의 그 무겁고 무거운 무게가 이젠 감사라는 너무도 가벼운 사랑이란 회복의 무게로 바뀜을 보았다. 분명, 곧 형제의 찬양을 흠향하실 하나님은 오늘도 속히 형제와 자매가 더욱 큰 감사로 일어나길 위해 우리를 보내고 또 당신을 보내심을 믿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7장 11절)” 0911 하나님 도와주세요. 우리 교회 중보기도실에선 접수된 환자들의 기도 제목들이 있으면 나에게 전달된다. 전달 된 기도제목을 보면서 먼저 기도제목을 내 놓은 중보자와 통화하며 환자의 상태를 묻고 그 환자의 프라이버시가 중요하기에 환자나 가족과 통화를 해도 좋을 지를 묻는다. 췌장암, 49살. 직업은 어느 지검의 부장 검사. 왠지 명단을 보는 순간부터 이유를 모르는 안타까움 속에도 이 환자를 섬길 수 있다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직은 충분히 현역에서 뛰어야 할 젊은 나이를 강조하는 중보자의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적혀 있는 보호자에게 전화를 했다. 원하신다면 찾아뵙고 기도하며 섬기길 원한다고 말씀드리자 자신에게 전화한 것에 조금은 놀라하시더니 찾아 주길 원하셨다. 환자의 직업 성격상 조금은 깐깐하게 보이고 쉽게 접근이 어렵겠거니 하는 선입견을 갖고 조심스럽게 병실을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와 간병하는 그의 아내를 보는 순간 선입견이 얼마나 잘 못이었는지 약간의 충격이었다. 약간은 오만함과 거만하게 보이거나 신경질적으로 보일 것 같던 환우를 첫 대면하는 순간 그 얼굴에는 정직과 선함과 겸손이 쓰여 있는 듯 했고, 전화 목소리를 들을 때 조금씩 떨리던 그 아내의 목소리를 기억하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까? 염려했는데 그 큰 눈은 두려움과 불안한 빛이 역역하며 금방이라도 펑펑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 너무도 안타까워 마음이 타는 듯 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마음속으로 저절로 기도하게 되었다. 24년을 검사로 있으면서도 병이 들어 눕게 되니 소원이 생겼는데 지금처럼 전셋집이 아닌 자기 집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원을 듣게 되니 그의 얼굴에 나타난 첫인상이 수긍이 갔다. 그 부인은 헛배 부른 어느 사람처럼 살지 않고 목사님이신 친정아버지의 자녀답게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로 피아노 레슨을 하며 남편이 떳떳한 공직을 감당하도록 그리고 아빠를 따라 법률을 전공하길 원하는 입시생인 두 딸이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이들로 자라게 한 주변의 이야길 듣고 나니 너무도 이들 부부가 소중하게 생각되며 안타깝게 더욱 잘 섬기고 싶어졌다. 그러나, 찾아 갈 때마다 별로 좋지 않는 환자의 상태와 입원한 병원에 계시는 한 선생님의 귀 뜸도 긍정적인 이야기 보다는 부정적인 이야길 하니 마음이 조급해 지기 시작했다. 뭔가 이 부부가 투병하는데 지금처럼 공포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더 강력하게 투병할 수는 없을까? 이백여 남녀 봉사자들과 함께 기도할 때 사건이 터졌다. 환자 아내가 전화를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너무도 부정적인 이야길 더 구체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인을 만나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부인을 만났다. 그리고, 구약 성경의 민수기 13장 25절에서 14장 28절을 통해 우리 속에 숨겨져 있는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이야기 했다. 그리고 14장 2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 귀에 어떤 말씀이 들리게 하는 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했다. 하나님은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시행하시겠다란 그 약속을 기억하라며 마음속에 잠재된 두려움과 영적전쟁을 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 했다. 마침 남여 봉사자들 모임에서 사도행전 19장 11절부터 20절까지 설교를 통해 사도바울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을 묵상했던 말씀대로 우리가 섬기는 환자 한 분 한 분을 위해 손수건에 환자 이름을 쓰고 함께 손을 대고 땀과 눈물로 기도하던 봉사자들의 간절한 기도와 우리가 환자들이 끝까지 최선을 다해 투병하길 바라는 열정을 전해 주었다. 부인은 갑자기 “내가 지금까지 사탄에게 무엇인가 속아 두려워했던 것 같다. 만군의 하나님 앞과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성령님과 함께 온전히 병과 싸우겠다.” 하며 가볍게 환자 곁으로 돌아갔다. 감사의 시간이었다. 다음날부터 그동안 그렇게 속 썩이던 여러 간수치가 정상으로 돌아 왔다는 소식과 함께 그렇게 바라던 입원하지 않고 외래로 치료할 수 있는 항암을 하게 되었다고 너무 행복하다는 감사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 환자는 공직에서 사임을 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너무도 감격적인 일이다. 동양란 화분을 보내며 이 동양란처럼 끈기 있게 새 생명이 약동하는 투병과 환자의 소원인 아름다운 자기 집을 갖게 될 날을 기대하며, 두 딸이 보란 듯 자신들의 꿈을 이루도록 우린 오늘도 최선 다해 섬기며 중보기도 한다. 09-12 집사님! 우리가 있잖아요! 자매를 찾아가는 길은 어쩜 이렇게도 잘 꼬였는지 꼬불꼬불 잘도 돌아간다. 경기도 산골을 돌고 돌아 2시간여를 왔다. 약간의 현기증이 날 것만 같더니 여름의 싱그러운 아름다운 경치와 신선한 바람을 맞고 나니 그제야 좀 안정을 찾게 된다. 9층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환자들이 자유롭게 찬양도 하며, 열변을 토하며 자신이 투병 담에 대해 토론을 하는 소리, 두런두런 기도하는 소리... 소위 요양원이란 조금은 생소한 환자들의 공동체, 암 환자들이 함께 기거하며 요양하며 투병하는 이 풍경이 왠지 모르게 이국적스럽기도 하고 정감이 가기도 하다. 내가 찾는 환자의 병실에 들어가니 침상에 눈에 익은 그들의 흔적만 있고 보이질 않는다. 건너편 비어 있는 침대에 앉아 조금 기다리자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에 갔다 왔노라고 부부가 서로 손을 내밀며 내가 그 곳에 간다했던 말을 잊어버린 듯 어떻게 이 멀리까지 왔냐며 너무 행복해하며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를 것처럼 너무 너무 반가워한다. 갑자기 이렇게 사랑스런 가정에 불어 닥친 어려움과 고통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그들에게 들키기 전에 얼른 참아야 했다. 부부는 한 쪽씩 내 손을 붙잡고 놓아 주질 않으며 연신 그렇게 즐거워함을 보며 물었다. “내가 온 것이 그렇게도 좋아요?” 질문이 끝나자마자 “그럼요, 그럼요 우리에게는 오늘이 얼마나 멋진 날인데요. 너무 너무 행복해요!” 하는데 자꾸만 작아지는 내 마음은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들과 더 자주 하지 못하고 지금 내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겼다. 처음 유방암이라고 진단을 받았을 때만해도 쉽게 회복이 되고 염려 없다고 했는데 06년 12월에 재발이 되었고, 우리에게는 다음 해 9월 연결이 되었다. 투병을 하면서도 얼마나 예쁘게 사람들을 배려하고 믿음으로 잘 감당하는지 환자를 만나기만 하는 모든 봉사자들은 환자 때문에 너무나 기분이 좋다 할 정도로 긍정적이고 요즘 말로 엣지 있게 투병을 했다. 방문을 끝내고 돌아오려는데 나가서 함께 식사를 하자며 어린 동생들처럼 매어 달리는 부부를 어렵사리 떼놓고 오기가 쉽지 않했다. 꼭 어린 자녀들을 왠지 떼놓지 말아야 될 곳에 떼어 놓고 오는 심정이 이렇겠구나 생각하며 “난 더 이상 환자가 아니다!”라고 소리치자 단단히 약속했다. 지난 가을까지는 그래도 잘 견뎌냈고 좋은 소식만 들렸다. 한 주에 한번씩 만날 때마다 더욱 예뻐지는 모습과 그동안 항암의 어려움 또, 또 다른 전이로 인해 받는 고통들을 잘 감당하고 있어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의 약속이 잘 지켜짐에 감사했다. 그런데 가을바람이 매서워 겨울이 되었나 싶을 때부터 매주일 날 만나던 시간에 잘 보이질 않했다. 왠지 모를 불안한 마음을 갖고 전화를 했다. 그리고 무슨 일인데 요즘은 보이질 않냐고 했다. 직감은 했지만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너무나 힘든 목소리로 “목사님 저 너무 너무 아파요, 허리뼈에 전이가 심해서 앉지도 걷기도 힘들어요. 너무 아파요!” 점점 시들어 가는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은 왜 그렇게 그치질 않는지... 그렇다고 내색도 할 수 없으니 그저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만 있으려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정신을 차리고 지금 가장 아픈 것에 손을 대라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소리는 거의 울부짖는 듯 했지만 수화기 너머로 “아멘!, 아멘!” 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짐을 느끼며 “하나님 제발 우리 집사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요!” 기도할 뿐이었다. 며칠 만에 오늘 다시 전화를 했다. 그 곳에 가지 못한 마음에서 조금은 주저했지만 그래도 밝고 멋진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 좋았다. “사랑하는 집사님! 우리는 모두는 집사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알죠! 힘내세요! 힘내요! 집사님에게는 우리가 있잖아요!” 말하고 다음 주에는 찾아 가겠다하니 급하게 손사래를 치는 듯 “다시 항암을 다음 주에 해요. 그래서 어차피 서울로 가요!” 그 날 병원에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다시 밝고 맑은 집사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니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심에 감사를 드린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베드로전서 5장 7~9절) 10-01 하나님과 함께 찬양을 주일 이른 아침 예배를 섬기는 포에버 성가대는 연세가 지긋한 어른들이 섬기시는 성가대다. 새해 이틀째를 맞는 새벽 시무 예배를 위해 준비하는 성가대원 모두가 분주하다. 포에버 성가대가 찬양을 준비하면 난 먼저 한 자리를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육년 전 직장암 환자로 만났지만 투병 중에 호스피스에서 열정적인 봉사자가 되어 투병에 어려워하시는 환자에게 자신의 투병 담을 들려주며 함께 가자며 섬기는 봉사자, 또 언제부터인가는 권사님과 함께 교회 경조팀에서 喪(상)을 당한 가정을 위로하는 봉사자로 섬기시던 그분이 그 독한 항암제를 맞고도 찬양 드림이 좋아 항상 그 곳에서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는 그 곳에 보이지 않으셨다. 그 분은 며칠 전부터 중환자실에서 전이된 폐가 말썽을 일으켜 그치지 않는 기침 때문에 호흡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 어제는 중환자실로 그분을 찾아뵈었더니 기도해 달라며 오히려 자신이 섬기던 환우의 안부와 투병을 걱정하며 자신도 잘 감당하겠다고 약속하시던 그 분이 눈에 선해 절로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아버지 집사님이 저 곳, 하나님께 찬양 드리던 저 곳에 속히 다시 앉게 해 주소서!” 점심때가 막 지나 가고 있었다. 헨드폰에 눈에 익은 전화번호가 찍혔다. 집사님의 부인되시는 권사님이셨다. “급해요, 빨리 병원으로 와주세요, 뚜 뚜 뚜!” 병실에 도착해 보니 그렇게 요란스러웠던 기침소리도 없이 집사님은 아주 편하게 깊은 잠을 주무시고 계셨는데 침대 머리맡에는 쓰고 다니시던 가발이 주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 성가대가 찬양대에 선다고 가발을 가져다 달라 하시더니 기침으로 인해 도저히 안 되겠다며 가발을 쓰다듬더니 그 곳에 내려놓더라고요...!” 얼마나 마음으로 달려가고 싶으셨을까? 교회와 한 정류장 거리 병상에서 자신이 서야 되는 성가대의 자리가 빈자리가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에 얼마나 애타셨을까? 아침에 권사님께 “지금까지 90%를... 이제 한 발자국만 남았다...!” 그렇게 말씀하셨단다. 이제 얼마 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벼운 감사의 멍애로 바꾸어지실 십자가 아래 다다랄 거리가 이제 한 발자국만 남았을 것이라고 이해가 된다. 가족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집사님을 둘러싸고 함께 “...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잘 부르시던 찬양을 드리며 비록 지금은 우리 곁을 떠나가고 계지만 하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목자가 되셔서 조금도 부족하지 않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셔서 더 이상 기침과 고통 때문에 힘들지 않도록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강건하고 영광스러운 신령한 몸으로 소생시키셨음을 확신했다. 임종 예배를 드리는 중에 내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내 귀에 집사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내 잔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렇지!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으니 고백하는 집사님의 고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싶었다. 집사님은 그동안 63차례의 항암제와 7년의 투병을 통해 많은 환자들은 집사님과 만남을 고대하던 것을 생각하면 집사님은 짧지만 다함없는 삶을 사셨다. 언젠가 우리가 섬기던 환우의 장례를 섬기다 함께 차량을 이용하던 때가 있어 “집사님! 집사님은 어제 항암제 투여가 끝나고 이렇게 장례에 따라 오시면 힘들지 않아요?” 여쭈었던 기억이 있다. 그 때 집사님은 “아이고! 이번 항암은 정말 힘들었어요! 봐요 입안이 다 헐어 버렸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놈들이 저를 이기겠어요? 나는 지지 않아요.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내가 빌빌거리면 주님께 죄송하죠. 주님은 나 같은 것을 위해 십자가에 못도 박혀 돌아 가셨는데 내가 사는 동안 나는 하나님 은혜로 살아가는데 내가 쓸어 !”질 수는 없지요!” 이제 집사님은 자신이 섬기던 환우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신 것 같다. 생명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내 조급함과 두려움과 염려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주어진 하루가 얼마나 중요하기에 소중하게 아끼며 살아야 됨을 말씀하신 듯 하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개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편 23:5-6)” (이재관) 꿈은 시작되었지만... 형제에게는 계속되는 꿈이 있었다. 자신과 같이 낙심할 수밖에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보여 줄 수는 전부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기에 5년이 넘는 투병기간에도 그의 비젼은 언제나 새로웠었다. 지난해에는 병상에서 시간에 따라 밀려오는 통증을 이겨내며 시험을 봤지만 실패라는 쓴잔을 마셨다. 한번의 실패가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포기할 정도 나약하지는 않했다. 오히려 앞으로 자신이 이 일을 이루었을 때의 환희를 맛보고 싶어 했다. 형제는 10-2 아이들과 함께 춤을 추고 공감해요 수십 년 만에 최악의 눈 폭풍이 몰아치던 날, 세상은 온통 하얗게 하얀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때 우리는 "제 13회 사랑의 치유캠프"를 준비하고 “역사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 그리고 나”라는 주제를 가지고 출발했다. 사별가정의 아이들과 엄마들 그리고 봉사자들과 함께 우리 역사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자긍심을 높이고 우리가 누려야 하는 회복된 삶을 준비하고 싶었다. 오십 여명의 우리 팀들 대형버스와 또 하나의 스타렉스 차를 몰고 떠나던 날, 무진장 쏟아져 내리는 통영을 거쳐 거제도 그리고 포항까지 다녀오는 캠프는 무리라는 염려의 문자 속에 도착하지 못한 몇 몇 사람들이 자신들은 포기 하고 떠나라지만 정오가 40분이나 지나서야 전원 참석함과 동시에 첫 캠프지역인 통영을 향해 베테랑이라는 버스 기사도 걱정이 말이 아니었다. “특별히 기도했으니 안전하게 갑시다!” 출발을 알렸다. 눈길에는 오도 가도 못하는 자동차 들이 여기저기 무작정 서있었다. 길가에 서버린 수많은 차량들을 보면서 어려움에 처한 우리 사별가정들의 형편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돌아 갈 수도 없는 막막한 환경, 아무도 지금 도와 줄 수 없는 눈 폭풍에 내몰린 형편 속에서 속수무책인 저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지금 이 캠프는 아무리 가로 막는 어려움이 우리 앞에 있어도 가야하는 것이다. 모두가 긴장한 탓일까? 다른 때 캠프 같으면 보통 시끄러워 정신을 못 차리게 하던 아이들도 조용조용 자리에서 안전벨트를 하고 창 밖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계획했던 시간보다 6시간정도 늦게 도착한 통영은 봄과 같은 날씨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과 부모들이 협력하여 케익 만들기와 함께 캠프는 시작되었다. 케익 베이스에 그려진 알 수 없는 선들, 이 선들 가운데를 장식을 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어른들과 아이들은 아이디어를 내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실력과 지혜를 총동원했다. 마무리가 되었다. 12조각으로 나뉘었던 각 팀의 케익을 모두가 함께 들고 와서 한 곳에 모으고 각 조각들을 붙여 나가자 갑자기 아이들과 어른들은 “와아!”하며 함성을 질러 댔다. 자신들이 장식한 아름다운 케익이 어쩌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예수님의 화사하게 웃으시는 얼굴이 되었는지 신기해했다. 성훈이가 한쪽 눈의 눈동자에 올려놓은 작은 방울토마토는 예수님이 우리 캠프에 참석한 아이들과 어른들 그리고 봉사자들을 보시며 윙크하시는 듯했다. 서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함께 함으로 자연스럽게 지금껏 지내 온 힘들고 어려웠던 부분들이 처음 캠프 시작부터 눈 녹듯이 녹아 버리니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연스럽게 웃음소리가 커지고 함께함에 대한 감사들이 역력했다. 다음 날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이 활동하셨던 한산도 기행을 통해 전문 가이드의 구수한 입담 속에서 잊었던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나(我)는 어떤 환경에서도 감당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갖고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향했다. 도착 때는 처음 온 곳이라 신나 하던 가장 어린 9살 상준이도 처음 체험하는 말로만 듣던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을 통해 얼마나 자유와 평화가 소중한 것인지에 상당히 심각해졌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통영 앞 바다, 한려수도를 관람할 수 있는 케이블카를 타고 아름다움에 취하였다가, 저녁을 맞아 낮에 이루어진 캠프 의미와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함께 생각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몸을 하얀 종이에 모형 뜨고 아름답게 장식하며 그 사랑하심을 나누는 회복을 위한 미술치료 시간을 갖게 되었다. 오늘을 있게 하신 하나님, 그리고 지금도 함께 하신 한 부모님을 통해 얼마나 서로에게 아름다운 관계인가를 확인하고 영성집회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사랑이 회복된 시간, 그리고 공감되고 서로에게 자존감이 회복된 시간이었기에 서로 허깅하고 격려하는 시간에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회복이 일어난 기쁨의 눈물과 감동의 시간이었다. 아무도 그 밤을 잠을 이룰 수 없다 했지만 내일 감동의 포항제철을 기대하며 늦은 단잠을 빠졌다. 포항제철 너무도 웅장해서 말이 필요 없는 감동은 높아질 대로 높아진 자존심은 우리의 지금까지의 모든 부족함을 날려 보리기에 충분했다. 봉사자로서 섬긴 이들이 고백한다. 이들을 섬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캠프를 통해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며 회복함을 보여 주었다고... 10-3 아버지 나의 아버지 사랑합니다! 펄펄 흩날리는 눈발을 보고 있자니 은근히 걱정스럽다. 산에 오르는 길이 조금은 가파른데 운구차가 눈으로 인해 미끌어지진 안할까? 눈발이 심해지면 이렇게 나를 위로하시겠다고 오신 수많은 조문객들에게 불편을 들일 것 같아 내심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나, 천국환송예배를 마치고 운구 위원들이 관 주변에 들러 서있을 때 정해졌던 시간인양 삽시간에 오던 눈발이 그치고 포근함까지 느낄 정도의 봄 날씨로 변했다. 선도차가 떠나고 버스가 뒤를 달려 장지로 향하는 내 마음은 참으로 표현하기 힘든 지난날 들이 뒤엉켜 아버지와의 회한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저 밖을 좀 봐! 너무 아름답다, 아름다워...!”지난 밤 내린 눈은 3월의 눈으론 좀 많이 온다 했는데 그 눈들이 산하의 모든 나무 가지마다 이렇게 아름답게 눈꽃을 만들려고 그랬나 보다. 모두 다 목소리에 끌려 창밖을 내다 보다 “안수집사님이 그림도 그리시고 멋쟁이더니 그 가시 날도 이렇게 아름다운 눈꽃들의 배웅을 받고 계신다”며 목사님이 너무나 부럽다고 다들 한마디씩 위로하시지만 그 위로가 마음에 도달하기 전에 또다시 닷세동안 한 질문이 생겨난다. 어떻게 된 일일까? 정말로 지금 떠나신 것인가? 부르신 분은 준비가 되셨기에 그때에 부르셨음을 인정하지만, 떠나신 분에 대해 아들로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음에 혼란스러웠다. 새하얀 묘지 위에 나무마다 피어난 눈꽃들의 향연 속에 영면하실 자리에 들어가시는 순간 갑자기 구름이 열리고 햇빛이 잠깐 보이는 것이 구름커튼을 열고 땅을 내려다보시는 착각을 받으며 아버지는 아내를 먼저 보내신 후 9년 만에 모처럼 그렇게 어머니 곁에 누우셨다. 이틀 후 떠나신 것이 분명한데 아들딸들과 손자 손녀들이 함께선 부모님의 묘역에 서있건만 금방이라도 나를 부르시는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데 두리번두리번 돌아보아도 지나가는 비문들 스치는 바람소리만 바닥에 깔려 있는 눈발과 함께 날아간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오후 2시에 결혼 주례가 있어 분주하게 결혼식장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전화가 왔다. 오후 한 시 사십오 분. “제가 주례 준비로 바빠서 지금 전화가 곤란하니 다음에 연락드리지요!” 정중하게 거절을 하려는데 다급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무엇인가 잘 못된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목욕탕에서 심장마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와서 확인해 달라는 경찰관의 목소리였다. 무슨 소리야. 장난전화 이길 바랐다. 도무지 이해가 되는 소리가 아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통화를 하고 안부를 묻고 내일 식사 약속까지 하지 않했던가...? 원래는 매주 토요일에 식사를 함께 하시는데 어제 약속을 위해 밤에 전화 드렸을 때 무엇인가 바쁘시다 곤란해 하시기에 재차 약속을 위해 토요일 아침에 전화를 드리니 그럼 주일이 좋겠다하셔서 식사는 주일 오후로 미루어 졌다. 대신 전날 도우미 아주머니가 퇴근하시며 챙겨 놓으신 식사를 하시고 항상 그러셨듯이 아침에 운동을 하시고 더운 목욕탕 물에 몸을 담그시고 피곤을 푸시는 순간 심장마비가 오셨단다. 주례를 하면서도 갑자기 벌어진 사태를 어떻게 수숩하나? 지금 주례를 잘 감당하야는데... 별별 생각과 마음이 교차하는 순간들이었다. 은혜로 주례를 마지고 급히 병원으로 달렸다. 아무말씀도 없으신 아버지 곁에는 아내와 삼일 전에 치과 치료차 삼년 만에 귀국한 손자가 할아버지 곁에 서있었지만 믿어지지 않는 일을 받아들여야 하는 혼란의 시작이었다. 아버진 내가 중학생 때와 고등학생 때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을 두 번하셨다. 아버진 내 나이 육십을 바라보아도 언제나 담임선생님으로서의 위엄을 갖고 계셨기에 조심성 있게 다가갔다. 그런데 아버지 떠나시던 삼일 전 수 년 만에 귀국한 손자의 큰절을 받으시며 너무나 즐거워하시기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좋으시냐고 조금은 농처럼 여쭈었던 기억이 났다. 그것이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부담 없이 가볍게 여쭈고 나서 혼자 생각하길, 내 아들이 할아버지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것처럼 내가 좀더 아버지께 가까이 다가왔구나 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사십여년 투병을 지극정성으로 섬기셨다. 우린 그것을 보고 배우며 자라왔다. 결국 그 안에서 나를 하나님은 늦게 시작한 목회에서 환자들을 위해만 이십여년을 달려오게 하신 바탕이 되게셨다. 그리고 지금껏 내가 마음껏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게 하신 부족하지 아니하신 인도자셨고 신앙의 버팀목이셨다. 이제 그렇게 떠나셨지만 아직은 인정이 되지 않는 허망함은 무엇으로 이해해애 할까? 금방이라도 아버지! 라고 부르면 그 근엄함으로 대답하실 것 같은데 이젠 약속으로만 그 음성을 확인해야 하려나 보다. “주님을 사랑한 것처럼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전해드리고 싶다. 10-4 손수건의 기적 주일 그날, 07:30분 남자 봉사자들의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도행전 19장 12절에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란 본문을 가지고 메시지를 전했다. 선교사들의 재충전을 위해 세워진 대학에 잠깐 있을 때 나의 실패담 이야기를 우리 봉사자들에게 들려드렸다. 어느 선교사 부부가 풍토병에 몸 져 누었는데 그들의 회복을 위해 이 손수건에 기도하자며 수업시간에 손수건 두 장을 들고 들어온 그 학기 책임자 교수님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 했다. 많은 선교사들이 그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신들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섬김을 다하듯 열정적인 기도를 손수건에 손을 올려놓고 기도했다. 난 그 기도의 대열에 동참하지 못하고 얼마나 교만한 생각을 갖고 냉소적이었던지를 예화로 들려주며 두 달 후 풍토병에 걸린 선교사들의 회복 소식을 듣고 손수건이 문제가 아니라 함께 기도했던 중보자들의 기도가 중요했던 능력이라고 설교를 마쳤다. 봉사자 모임이 끝나고 난 후, 남자 봉사자들의 중보기도 팀장이 전화를 했다. 설교를 들은 봉사자 한 분이 우리도 우리가 섬기는 환자를 위해 손수건을 놓고 기도해서 환자들에게 전달해 주면 어떻겠냐며 참으로 난처하다는 것이다. 팀장님께 우리의 기도 응답자는 우리가 아닌 것을 다시 한번 주지시키며 믿음대로 해 봄도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 놓았다. 대신 그 중보기도회를 내가 주관해 준다는 확답을 받고서 수요예배가 끝나는 밤 8시 30분에 기도회는 시작이 되었는데, 남자 봉사자들이 섬기는 환자의 숫자만큼 쌓아진 손수건을 보면서 얼마나 이들이 환자들을 사랑하며 또, 얼마나 간절히 이들을 위해 섬기기를 원하는 가를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아 갑자기 기도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난 신명이 났다. 손수건 한 장 한 장에 환자 한 사람 한사람 이름을 적어 가며 그 환자의 어려운 상황과 그 환자의 가장 필요한 부분을 서로 말하고 간절히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했다. 모든 환자의 기도가 마무리 되었을 때 밤 11시 55분이 되었다. 기도회가 끝나 봉사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돌아본 봉사자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불그스럽게 홍조 띄고 있었고 목 뒤에서는 땀들이 나와 김들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을 보고 나니 너무나 뿌듯했다. 이런 열정과 사랑이면 하나님은 분명하게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실 것 같다는 막연하지만 자신감이 생겼다. 그 주간부터 봉사자들은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를 소개하며 수건을 나르는 전령자가 되었다. ...중략... 평소에 환자를 방문해도 나타나는 반응은 믿음의 정도가 너무도 미온적이라 실망도 많이 했고 안스럽기도 그지 없었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집으로 방문은 회피하는 경향이고 병원에 입원중일 때는 그런대로 반겨주는 정도였습니다. 매주 목요일을 방문하는 날로 정해놓고 수요일에 다시 확인합니다. 이번에도 다른 약속이 있다고 다음으로 연기하자고 합니다. 이것이 그동안 제가 섬기던 분의 실상이었습니다. 조금은 강압적이지만 수건을 들고 그에게 찾아가 우리가 수건에 무엇을 했는지를 이야기 하고 기도하고 싶을 때마다 이 수건을 들고 기도하면 우리와 함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그에게 수건을 건네주고 왔습니다. 다시 방문하기 위해 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전화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유난히 힘이 있고 활기차게 들려서 요즘 어떠냐고 하니까 집사님이 주신 수건을 놓고 기도해서 그런지 복수가 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매주 두 번씩 복수를 빼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할렐루야하고 소리쳤습니다. 이제부터는 음식도 조심하고 생활을 조심해서 하자고 했더니 음식도 가리지 않고 먹고 하던 일도 조금씩 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님 이 현상은 수건에 뜨겁게 간절하게 기도한 우리 모두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거 맞으시지요!!! 몇 달이 지난 지금도 환자는 복수에서 해방이 되었고 손수건의 사건은 그에게 소망과 새로 운 신앙으로 투병하는 것이 무엇인지 체험을 통해 최선을 다해 믿음의 경주를 다하는 기회를 주셨고, 우리 호스피스 봉사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특권을 주셨다. 10-5 눈 깔 사탕이나 사 잡수세요! “며칠째 잠을 못잔 나를 보고 좀 눈도 붙이라고 해서 한 한시간정도 새벽녘에 잠깐 시들었는데 인기척이 없어 들여다보니 잠을 주무시는지 알았는데... 너무도 편안히 떠났더라구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담당 봉사자의 이야길 듣고 찾아간 우릴 보고 부인이 들려주는 이야길 들으며 며칠 전 병원에서 입원해 있으며 그렇게 힘들어했었는데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하며 퇴원한 지 이틀 만에 아름다운 마지막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2년 반전에 정기 검진에서 비소세포암(폐암)이 갈비뼈에 전이된 상태가 발견되었다. 그분은 처음 병명이 확인되자마자 “아이쿠! 올 것이 왔구나. 내가 그동안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하고 세상적인 것에만 눈을 돌리고 있었더니, 이젠 그만 하나님께 돌아오라 하시는 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었단다. “언젠가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시간이 주어지면 참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할 때였기에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노라고도 했다. 그는 곧바로 “주무시지도 졸지도 아니하시며 우편에서 그늘이 되시며, 낮의 해가 달이 나를 해치 못하게 영원히 지켜주시기로(시편 121편)”한 약속을 회복하고 주님과 함께하면 싸워볼만한 투병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는 참으로 긍정적이셨다. 그의 친구 의사가 말하길 “널 평소 그렇게 보질 안했는데 이런 병을 알고서도 무척 의연해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암이라 진단받고 나면 낙담하고 절망하는데... 말기 암환자인 넌 특별하다고”했다며 용기를 내어 주는 친구에게 고맙다했다는 이야길 들으며 우리 모두는 이런 환자라면 걱정을 하지 않해도 좋을 것 다고 했다. 암 판정을 받은 후 1년 만에 그는 척추에 암세포가 전이되었음을 알았고, 향후 여명 기간은 3~6개월 정도라고 병원에서는 판정했다. 그러나 그는 2년 반을 넘는 삶을 살아 주었다. 그냥 산 것이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위로를 주었다. 폐암 말기라는 병과 싸우는 투병을 하지만 그는 언제나 당당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주변의 믿음의 형제들에게 자신이 잘 투병할 수 있도록 중보기도 부탁을 겸손하지만 당당하게 요구하던 그였다. 그러면서도 일분일초도 자신의 삶에 대해 포기하지 않도록 자신에게 축복하는 삶을 살았다. 자신이 환자이기에 투병하는 그 시간에도 다른 환자를 위해 충실하게 중보기도하는 자가 되어 헌신적인 섬김을 다 하였다. 항암주사를 맞기 전 백혈구 수치 검사를 통해 미달되면 주사를 맞지 못하기에 환자들에게는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모든 치료를 감당할 동안 백혈구 수치가 낮아 치료를 받지 모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이 온전한 투병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물론 이런 때를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삼십년 전에 만나게 해주셔서 자신에게 짝 지워 주셨다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런데 하루는 환자가 좀 심각하다는 봉사자의 보고가 있었다. 같은 투병을 하는 어떤 환자가 능력 있다는 어느 분의 안수기도를 받았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해 많이 의기소침했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기도했다. 그리고 그를 방문하여 기도했다. 환자는 그것으로 족했다고, 그리고 그의 진행되던 괴로운 부분이 아름답게 해결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환자는 다시 감사를 회복했다. 환자가 지난달 딸을 결혼 시키며 딸의 손을 잡고 예식장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기도했던지 하나님도 그때만은 충분한 강건함을 주셨던가 보다. 부르심 받기 이틀 전, 환자를 방문한 봉사자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고 섬겨준 우리 봉사자들에게 너무나 감사하다며 봉투하나를 주었다며 장례식장에서 나에게 건네주셨다. 물론 우린 수고했음에 대한 어떤 사례도 받지 않는다. 그런데 그 봉투의 글이 너무나 친근했다. “육십여명의 남자 봉사자들에게 자신이 기도의 빚을 졌으니 한 사람에 하나씩 눈 깔 사탕을 사서 나눠 잡수세요!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린 그의 아름다운 마음을 받아 앞으로 환자들의 쉼과 회복을 위한 쉼터 마련하기 위한 기금으로 오십배 백배, 만배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길 소원했다. 그가 마지막을 다 잘 정리하고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아직 고통 받고 투병하는 자를 위한 온전한 섬기는 자로 남으리라 다시 다짐해 본다. 10-6,7 이젠 정말 빨리 떠나고 싶어요 한 가족 세 명이 침대에 올라가 찍힌 사진 속에는 행복과 안도뿐이지 고통도 혼란도 없다. 환자가 서울을 벗어나 공기 좋은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얼마 전에 찾아가 볼 때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기억에 다시 가보기가 쉽지 않했다. 그 일로 환자를 자주 찾지 못함은 늘 마음이 편치 못했고, 병원에 오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전화로만 파악하니 답답했다. 워낙 많은 환자를 만나야 하니까 하는 변명 아닌 변명을 갖고 편치 못한 마음을 자위했다. 그 날, 왠지 마음이 조급해서 조금은 무리를 해서라도 가보자 했고, 새로운 몇몇 환자들이 마침 서울의 환경을 벗어나 그 주변으로 거처를 옮긴 분들을 있어 함께 방문을 약속했다. 새로 난 춘천 간 고속도로를 접어들어 환자 집에 당도하고 나서는 너무도 황당했다. 마음에 작정하고 떠난 시간에 비해 새로 난 길을 통해서 이렇게 빨리 도착하다니... 그동안 너무 먼 곳이라는 생각에 미루고 방문을 못한 회한이, 과분할 정도로 반가워하는 환자와 그 가족을 만나고 나니 너무나 미안했다. 마침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20살 아들이 방학이 되어 엄마 곁에 있었다. 그 아들을 보고 있는 엄마로서의 환자의 눈에 비치는 그 사랑스러움과 애처로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들이 와 있으니 좋죠?” 물음에 넋두리처럼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 있게 하는 건데...” 너무 어린 나이에 외국으로 보냈던 것을 안타깝게 후회하고 있었다. “목사님 이젠 정말 빨리 떠나고 싶어요!” 간절함이 서린 체념 같은 소리에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우면 이런 말을 하나 생각하니 내 마음 전부가 먹먹해 왔다. “머리에 방사선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을 몰랐어요. 사람들이 머리에 방사선 치료를 말리기에 왜 그럴까 했어요. 먹는 것도 그렇고, 잠도 그렇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에요” 가슴에서 머리로 전이된 종양 때문에 방사선 치료를 더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 힘든 환자. “집사님이 빨리 떠나고 싶다는데 보낼 자신이 있냐?”고 남편과 아들을 보며 내가 물었다. 남편과 아들은 눈물을 보이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환자 가족만이 겪어야 하는 아픔이기에 또 대답을 못하는 그 깊은 사랑을 너무도 잘 알 수 있었기에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집사님! 유명한 미국 극작가 중에 너무 힘든 투병을 했는데 그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항상 오늘을 주신 것을 너무도 감사했답니다. 옆에 있던 아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무슨 감사가 나옵니까? 질문을 했답니다. 그런데 환자는 자신이 눈을 Em는 순간 최소한 5가지를 감사하는데 첫째는 사랑하는 당신이 곁에 있음에 감사하고, 둘째는 가족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셋째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탈고했음에 감사했습니다. 이것을 우리식으로 말한다면 자신의 모든 삶을 잘 정리할 수 있었음에 감사했습니다. 넷째로 자신이 오늘도 병과 싸울 수 있었음에 감사했고, 다섯째 가장 감사한 것은 자신이 연약하기에 하나님께서 자신과 가장 가까이에 계실 것을 알기에 감사했습니다. 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시는 성령님(고전12:3)께서 집사님 가운데 함께 하신다 약속하시는데 과연 그렇게 포기하시도록 기뻐하실까요? 또,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교통감화 감동하신다(고후13:13) 하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집사님이 피곤하지 않도록 능력을 주시고 무능하지 않도록 힘을 더하시는(사40:29) 그 은혜를 기억하고 다시 투병하시시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빌립보서 4장 4-7의 말씀처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할 능력도, 염려하지 않을 권세도 감사함으로 회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만 집사님의 마음도 생각도 지켜 주실 것을 믿고 투병 합시다 말씀드렸다. 거기에 하나 덧붙여 “왜?” 라는 질문을 하지 말고 “어떻게 할까?”를 통해 자신의 하루를 부정적으로 시작하지 말고 긍정적인 답을 찾기 위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해야 한다 권면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은 나 혼자 이 투병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그 모든 짐을 내려놓고 “내가 다 이루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네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그 음성을 믿음으로 듣도록 하면 다시 오늘의 감사를 회복할 것입니다. 어차피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안다면 시편90편 5절 말씀처럼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 땅에 오늘 실수로 집사님를 남겨 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며 그 집을 나올 때 집사님은 이제 그 고통과 혼란을 이길 웃음으로 우리를 배웅해 주셨다. 10-8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무게 입관예배를 드리는 내내 얼굴을 들지 못하고 흐느끼는 남편 집사님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십여년의 세월을 최선을 다해 간병한 남편 마음을 어떻게 위로하고 소망을 말하랴 아련하다. 딸 둘을 둔 가정에 막내가 아들로 태어난 일은 경사였다. 두 딸과 아들이 주는 흡족함과 감사를 그리고 이 행복함은 마르지 않을 것 같았다. 아들이 태어나 네 살이 될 때 아내는 몸이 점점 굳어진다고 알 수 없는 고통을 말했다. 한의사인 남편은 산후풍이려니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뇌와 중추신경계에서 다발성으로 일어나는 희귀질환인 원인도 잘 모르는 “다발성 근육경화”라는 병이라는 것이 알려진 그날부터 십년의 투병의 시간은 가족 모두에게 소망을 갖다가도 날이 가면 갈수록 새로운 절망을 갖게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에는 언어 소통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말하고 듣고 느끼시는데 어려움이 없는 듯했지만 언제인가부터는 아예 대화도 통할 수가 없었다. 집사님은 눈도 크고 피부도 곱고 아름다운 분이었다. 우리가 찾아가면 기도하고 말씀 듣고 또, 그렇게 찬송 부르기를 좋아하던 집사님, 그러나 찬송할 수 없는 형편이 되니 아름답게 큰 눈에는 눈물만 그렁그렁하다 넘쳐 나기 일 수였다. 딸의 안타까운 형편이 자신의 책임인양 연로하신 친정어머님이 오셔서 간병하셨다. 외손녀들과 외손자를 엄마를 대신하여 키워주며, 말도 통하지 않고 움직일 수도 없는 딸을 간병하시며 자신이 한의사이기에 고쳐 보겠다고 애쓰는 사위를 볼 때마다 친정어머니이신 권사님은 5년 동안 하루에도 몇 십번씩 무너지는 가슴을 안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너무 피곤했나? 친정어머님이 조금은 쉬셔야겠다고 시골로 내려가셨다. 그 후로 친정어머니는 서울에 올라오시질 못하셨다. 딸의 아픔과 고통을 부여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떠나셨던 것이다. 어느 날부터 보이질 않으시는 친정어머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도 참으로 난감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딸은 왜 어머니가 무슨 일이 있어 오시지 않나 난감해 하는 눈빛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환자에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갑작스레 집사님이 호흡곤란이 와서 위급하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무도 어머님의 부음을 알려주지 않했어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어머님을 느꼈을 것이다. 그때는 위기를 넘겼지만 그로부터 오년동안 우리는 환자가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자주자 들어야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임종예배를 드린다고 법석을 떨곤 했다. 지난해에는 장로님이신 친정아버님이 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딸 앞에서 세상을 떠날 때 친정 부모님들은 어떤 괴로움이었을까? 자녀가 건강해도 앞서가시는 부모들은 힘들고 어려운데 아마도 그 아픔을 하나님께 아뢰기 위해 먼저 떠나셨나 보다 생각했다. 지난 봄, 다시 응급실로 실려 오셨다는 이야길 듣고 찾아가 뵈니 집사님은 힘없고 지친 모습이지만 그 자신이 아직 아이들 옆에 있어주고 또, 그 자녀들이 자라가는 바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친정 부모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위로를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여름이 되었다, 해외 의료선교로 자주 출국을 하였다. 다음 선교지로 떠나가기 전 한 주간의 여유로움이 있었다. 십여년을 섬겼던 집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식이 그때 왔다. 막상 집사님이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래도 나에게 무엇인가 말씀하고 싶으셨구나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집사님이 “어머니! 아버지!” 하고 친정 부모님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말할 수도 없었던 나오지 않던 옛날의 그 목소리가 터지고, 뛸 수 없었던 다리로 뛰어가는 집사님은 너무나 행복한 자유를 만끽하시는 듯했다. 잠시 동안 보였던 집사님은 떠나고 이제 눈앞에는 그동안 십여년 동안을 최선을 다해서 아내를 섬겼지만 그대로 떠나보낸 것이 자신의 불찰인양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물짓는 남편집사님을 바라보니 서로의 사랑의 무게가 얼마나 큰 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천방지축 같은 아이들이 벌써 대학생, 고등학생이 되어 의젓한 모습으로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것을 보면서 애써 다시 한번 남편 집사님이 받을 위로를 생각해 본다. 10-9 이제는 평안하소서 영원한 스승, 우리 모두의 멘토이신 목사님. 아이들을 위해 항상 관심을 보여 주셨던 목사님께 토요일 병실에 들려 이번학기에 아들과 딸이 보스톤에 G신학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단번에 애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 “너무 잘 되었다! 정말 잘 됐네. 그 학교에는 세계적인 교수님이 몇 분 계시지...!” 너무나 반갑게 축하를 해 주셨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씀을 하셨는데 다음 날 주일 새벽 폐렴으로 인해 호흡의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는 사모님의 급한 전갈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팔월 칠일 밤부터 심해진 기침과 호흡곤란은 병실의 용량이 작은 호흡기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고 급기야 주일 아침 10시에 중환자실로 내려 가셔서 집중치료를 받게 되셨다. 중환자실로 내려가는 내내 침대를 붙잡고 가면서 평안한 투병이 되시도록 그리고 어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길 기도하며 따라가는데 발은 걸어가는데 마음은 무거워 내려앉는 듯했다. “목사님! 잘 치료하시고 건강하게 나오세요!” 중환자실의 문이 닫히기 전 인사를 드리자 목사님은 그 호흡이 가쁜 중에도 “내 걱정 말라 너 건강 조심해!” 말씀하시고 손을 들어 흔들어 주시는데 중환자실의 문이 닫히며 환한 창문에 비친 침대에 누워 가시는 실루엣의 묘한 분위기에 왈칵 눈물이 나왔지만 이건 아니야 하며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면회 시간이 되어 중환자실에 들어가 목사님을 뵈면 호흡의 어려움을 덜어 드리기 위해 수면제를 투여하고 계시기는 하지만, 그동안 오랫동안 잠을 잘 이루지 못하시던 괴로움 없이 평안한 잠을 주무시고 계심에 감사하고 곧 좋은 결과로 일어나실 것만 같았다. 상태가 조금 호전되어 중환자실에서 잠을 깨워드리는 날, 잠깐 잠에서 깨어나신 목사님은 입에 물려진 호흡기 때문에 말씀을 하실 수 없었기에 조그만 화이트보드에 가장 보고 싶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모든 성도요 모두를 사랑한다고” 글을 쓰셨다. 그렇게 회복하실 줄 믿었기에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중환자실을 드나 다니며 만져지는 팔다리의 근육이 점점 빠져 가는 모습을 뵙는 것 자체가 차라리 사모님과 자녀들에게 뭐라 소망을 줄 수 없는 마음이 죄송스러움뿐이었고 이십여년 환자를 섬긴 경험으로 인해 자꾸만 작아지는 믿음이 원망스러웠다. 교회는 더욱 열심히 목사님의 쾌유를 위해 믿음으로 기도했다. 그러다 8월도 마지막 날을 향해 달려 갈 때 우리 환자들에게 항상 목사님이 말씀하시던 말씀처럼 “하나님이 잘 해주실 것이다!”는 사실을 믿었다. 한 주간 약속된 캄보디아 의료선교를 다녀와야 했다. 얼마나 마음의 조바심이 나는지. 간절히 기도하기를 “목사님 제발 잘 참아주세요.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됩니다!” 기도했다. 캄보디아에 가보니 목사님께서 사랑하시던 고아원에 거하는 아이들까지 새벽과 저녁에 시간을 정해 놓고 “옥한흠 할아버지 살려 주세요!” 기도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가장 낮은 한 영혼을 위해 사셨던가를 다시 한번 깨닫고 나니 감동이었다. 공항에 내려 병원에 연락을 해 보니 그대로 잘 감당하고 계심을 알고 얼마나 감사했던지... 9월 1일 밤, 의료선교의 한 선생님이 마침 목사님의 상태를 좀더 정확히 알고 싶어 하는 날 위해 목사님이 계시는 중환자실로 가서 모든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믿고 싶지 안했지만 위급하신 상황을 알고 나니 밤을 꼬박 조바심으로 보내었다. 2일 이른 아침 혈압이 위험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문자를 받고, 급히 병원을 향했다. 마음은 급한데 콘바스라는 태풍의 비바람으로 인해 정전이 되고 엘리베타에 갇혀 한 3분간 꼼작 못하게 되자 그 3분은 영원히 나오지 못할 정도의 답답함과 막막함을 주었다. 08시 37분 목사님은 호흡을 더 이상 이어가시지 못하셨다. 가족들과 함께 목사님이 즐겨부르시던 “나 같은 죄인...”이란 찬송을 불러들이고 목사님이 너무 좋아하시던 주기도문을 함께 외우며 함께 동역하시던 절친하신 손 목사님의 기도 중 6분 후 08시 43분 심장도 더 이상 뛰기를 멈추셨고, 너무도 평안하신 모습으로 깊은 잠을 주무시며 주님의 품에 안기셨다. 한 권사님이 환자복장 보다는 화사한 잠옷을 마지막에 입혀 드리면 좋겠다하여 잠옷을 준비했고 그 잠옷으로 갈아입으시고 누워계시는 목사님의 얼굴을 뵙고 있는 중에 시편 23편 1~3을 외워드리고 있는데 “나로 인해 걱정하지 말라!” 하시는 목사님의 음성을 듣는 듯 했다. 사랑하는 목사님!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시며 멘토이신 목사님 이젠 편히 쉬소서 다시 만날 그 날을 기약합니다. 사랑합니다! 10-10 당신은 지금 얼마나 감사하십니까? 갑상선 암으로 고생하시다 치료가 잘 되었다 했을 때 다시 췌장암으로 그리고 전신에 전이가 된 상태로 재발을 하신 권사님 한 분이 삼년 전 우리에게 연결이 되었다. 칠십 후반을 살고 계시던 권사님은 얼핏 뵙기에 오십대라고 해도 믿을 만큼 고우셨다. 고우신 모습만큼이나 긍정적이고 자신의 삶에 대해 적극적이셨고 화사하게 차리고 사시기를 좋아 하셨다. 자녀들은 투병을 하는 어머니에게 함께 사시길 권하셨지만 당신 자신이 누구의 도움보다 혼자 자유롭게 투병하시며 사시길 원하셔서 도우미 한 분과 사셨다. 권사님은 외모로 뵙기에는 상당히 중증환자이셨다. 우리가 섬기기 시작하며 놀라운 광경을 보고 알게 되며 권사님을 더 경이롭게 보게 되었다. 팔년 전 알았던 갑상선의 후유증과 전이된 상태로 인해 모든 식사를 입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사기를 통해 위에 꽂혀 있는 호스에 직접 주사해서 집어넣는 작업(?)을 해야지만 식사문제가 해결이 되었다. 식사만 아니라 위 속으로 집어넣어야 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먹었다라고 표현하지만 권사님은 먹은 것이 아니라 집어넣었다란 표현의 이런 수고로움을 통해야만 문제 해결이 되었다. 숨을 마음껏 자유롭게 쉬고, 졸릴 때 마음대로 잠을 자고, 일어나면 습관처럼 배설하고 먹고 마시고 활동하는 이 모든 것에 우리는 아무런 어려움을 갖지 못하고 살기에 이 모든 일들이 하찮은 것처럼 생각이 되어 이런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치도 잊고 살아간다. 그러나 환자들을 섬기다 보면 하찮게 보이는 이 모든 일과가 어려움 없이 해결되고 있다는 것 이 얼마나 소중하고 신비한 일인지 모른다. 가장 기본적인 일에 우리가 감사를 갖지 못하기에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 감사를 찾고 그렇게 살아가기 보다는 불평만을 쫓는 삶에 익숙해 졌는지도 모른다. 권사님을 섬기면서 나의 삶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감사인 것을 매일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권사님은 긍정적이시기에 자신은 비록 어려운 투병을 할지라도 동네 친구들과 함께 모여 이야기 하고 함께 주어진 삶을 즐길 줄 아셨다. 그러기에 권사님을 한가로이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항상 친구들과의 약속 때문에 우리 만남의 약속은 기회를 잘 잡아야 했다. 지난여름 병원에 입원에 입원하신 권사님을 뵈러 갔다. 침대에 누워 계시던 권사님이 굳이 자리에서 일어나시겠다고 한참을 실랑이를 하셨다. 당신이 아무리 환자이지만 어떻게 자신을 찾아온 손님인데 누워서 만나냐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리 환자가 우선이라 해도 막무가내 이셔서 결국 환자의 침상에 같이 앉았다. 말씀을 하고 기도를 하는데 권사님이 얼마나 손을 꼭 잡으셨던지 손가락이 아파 기도를 길게 할 수 없었던 재미있던 일도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권사님은 시간이 갈수록 잠을 이루시지 못한다고 고통을 호소하셨다. 잠을 주무시면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다는 것이다.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고 결국 권사님 자신의 평안을 속이는 정체가 무엇인가를 직시하자고 권면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두려움을 주는 악한 권세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싸워 이길 힘을 달라고 기도하신 후부터는 권사님은 다시 하루하루 투병을 감사하는 평정을 되찾으셨다. 구월 중순이 되었다. 아무래도 하나님은 이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권사님에게 벗겨 주실 것 같았다. 입원한 호스피스 병원에서도 자꾸만 “오늘일 것입니다! 오늘일 것입니다. 준비하고 계세요” 라고 가족들에게 이야길 한다는 것이다. 가족들이 하루하루가 염려의 날들이기에 병실을 찾아가보니 아직은 며칠을 더 계실 것 같아 아직은 아니고 삼일정도 여유가 있을 것 같다 했는데 그렇게 말한 그 시각에 연락이 왔다. 권사님은 눈을 감고 계셨다. “권사님!” 하고 부르자 힘들게 눈을 뜨고 계셨다. “권사님! 이제 얼마 후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예수님을 만나실 것 같은데 좋으시죠? 그 곳에서는 이제 권사님의 불편했던 모든 짐을 벗어 버리시고 편안하게 온전한 몸으로 건강하게 살고 계시다가 우리를 맞아 주세요!” 권사님은 행복한 눈빛을 보내시고 안도하시더니 살짝 미소를 보이시고 “...평화 평화로다!...”란 우리의 찬송 소리에 감사의 눈빛으로 화답하시더니 하나님의 품으로 떠나셨다. 떠나는 모습에 가족들은 슬픔 속에서도 그 평안함에 더 이상 고통이나 아픔이나 눈물이 없는 곳을 바라봄으로 모두가 감사하는 말로 서로 위로했다. 1011(12) 다시 찾을께요^^희망찬 하루가 되세요. 징이잉! 헨드폰에 문자가 왔다는 소리와 함께 눈에 별로 익지 않은 전화번호가 떴다. 누구일까? 문자를 열어 보았다. 문자를 읽다가 무언지 모르겠지만 순간 마음이 찡하더니 전율처럼 감동이 전해왔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여서 다시 행복을 찾을께요^^희망찬 하루가 되세요.” 이 문자를 보낸 사람은 53세 된 자궁암3기환자로 임파선을 타고 뼈까지 전이 된 환자다. 이 분은 우리에게 올해 초에 연결이 되었고, 특별한 안타까움을 갖게 한 환자다. 이 분은 중국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북한 **지역으로 들어 가 살다 결혼하여 두 자녀를 얻고 살았다. 결혼 생활은 그래도 중국에서 살 때보다는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어느 날 이 가정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고 행복했던 가족이란 이름이 해체되어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남편이 하루 밤 사이에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 바람에 두 자녀를 다른 사람에게 주고 먼발치에서 자식이지만 자식으로 돌보지 못하고 아픔을 겪다가 자신이 살아야 할 곳이라 여겼던 찾아갔던 조국이란 곳을 그저 살기 위해 탈출하여야만 했다. 대부분 우리나라에 들어온 탈북자들이 그렇듯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 발각되면 왔던 길을 인간이길 포기한체 끌려가 죽음이란 선택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불안과 공포 속에서 숨어 지낸 그 수많은 방황했던 시간을 거쳐 얼마 전 안전한 보금자릴 다시 찾았지만 아무도 없는 이 낯선 땅에서 먼저 입국했던 친척을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 친척은 그렇게 고생하고 정착한 이 분에게 예수님을 소개했고, 그녀는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 들이고 이제 내가 이 새로운 땅에서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 믿게 되었다. 그동안 몸에 조금씩의 이상을 느꼈지만, 남한으로 넘어 오는 과정 속에 너무도 험난한 수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어서 그렇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안정될 것이고 몸도 편안해지고 마음도 회복되겠지 생각했다. 일은 지난해 말 갑자기 터졌다. 주변의 권유로 받은 검진결과 자궁암 3기로 판정이 나왔다. 그것도 임파선을 넘어 뼈까지 전이가 되었단다. 그동안 50년을 살아오면서 세상에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병명 앞에 여기까지 왔는데 모든 것을 다 포기해야 하나 눈물만이 하루 삶의 전부가 되었다. 그때 그녀는 친척을 통해 자신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때문에 살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인 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냥 살려달라고, 그리고 또 치료해 달라고 애가 끊어지는 간절함과 생명을 사는 길은 이 길밖에 없다 믿었기에 또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다. 응답이었나? 지난 봄부터 계속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더니 지금은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우리 봉사자들은 그녀를 섬기고 나면 누구나 다 같은 말을 하시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 분 정말 순수하시다”는 말이었다. 이 순수한 마음과 믿음이 구약성경 민수기14장 28절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그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하셨던 말씀처럼 하나님의 귀에 믿음의 감사로 들려 계속 회복되길 위해 우리도 기도했다. 연말쯤 되면 세상 사람들 속에서도 긍휼의 마음과 생각들이 흘러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는 조금의 여유가 생기는 아름다운 일들이 우리가 섬기는 환자나 사별 가정들 중에 조금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몇명 소개해 달라고 연락이 왔다. 몇 분의 환자와 사별 가정을 소개하다가 이 환자가 다시 미열과 약간의 통증이 있어 입원했다는 것을 알고 병원으로 찾아 갔더니 너무 반가워하며 우리를 맞지만 퉁퉁 부은 얼굴을 보니 마음이 시려 왔다. 이야기를 나누다 북에 있는 아이들과는 연락이 되고 있냐 했더니 자기가 그 곳에서 나온 후 얼마 전 딸이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사위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며 눈물을 흘리며 아쉬움이 한탄이 될 때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투병하자 기도하고 돌아오는 내내 유난히도 안개가 잦은 요즘처럼 달리는 차창 밖을 보아도 쾌청한 하늘인데도 답답하지만. 그러나 그녀가 보낸 문자처럼 “목사님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여서 다시 행복을 찾을께요^^희망찬 하루가 되세요.” 그래 그녀는 분명 예수님으로 승리하고 반드시 행복을 찾을 것을 크게 소리내어 축복하고 축복해 본다. 11-1 새 해, 내 이름을 바꾸자! 환자들을 처음 소개 받으면 그 분들의 이름을 통해 어떤 사람일까를 나름 먼저 상상해 보는 버릇이 있다. 이 버릇은 그 환자에 대해 그 가족에게서 들은 현재 상태와 환자가 자신의 상황를 어떻게 생각하는 가를 묻고 그 이름에 맞는 적극적인 믿음의 섬김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하고 환자를 만나러 간다. 이름은 결국 그 사람의 전부를 대표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의 표현으로 불려지는 이름의 의미대로 사람들은 현재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아버지로서 우리의 이름을 그렇게 중요시 여기셨다. 그래서 성경 창세기 17장에 보면 "아브람이었던 아름을 아브라함으로 사래여던 이름을 사라"로 바꾸시며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고 싶은 믿음의 그림을 통해 복을 주시길 원하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하고 그 믿음을 통해 "...상을 받는 것도 반드시 믿어야 한다”고 히브리서 11장은 말하고 있다. 아침에 교회 마당에서 그랬다. 오늘이 고비인데 어려울 것 같다며 눈물이 글썽글썽한 환자의 가족을 만났다. 그리고 저녁때가 다 되어 연락이 왔다. 이 저녁을 넘길 수 없다한다고... 병원에 급히 달려 간 얼마 후 그분은 그 고통의 시간을 뒤로하고 영원한 본향의 길을 떠나 가셨다. 이 환자만 해도 주변 가족들이 한 달 전에 연락을 했었다. 환자에게 어떻게 말해야 “호스피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환자만 원한다면야 얼마든지 우리는 섬길 수 있다고 말씀드렸었지만, 그런데 아무런 소식도 없이 한 주, 두 주, 세 주가 지나가더니 한 달이 약간 넘어 갈 때야 이제 환자에게 와 줄 수 없냐고 연락이 왔다. 찾아가보니 환자는 도저히 침대에 앉아 있을 상황도, 의지도 없는 정말 그 가족들이 말하는 것처럼 도무지 소망이 없는 상태였다. 무조건 세례만이라도 받게 해 달라는 것이다. 세례를 받는다 해서 지금의 고통이나 환경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 보다 먼저 그 분의 이름을 바꾸도록 도움을 주어야 했다. 고통을 받던 세상의 그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아름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는 금방 마음을 열고 세상의 이름의 의미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릴 이름을 받고 “아멘!”이라고 화답하며 받아 들였다. 봉사자가 축하한다고 가져온 케익에 한 개의 촛불을 밝히고, 그 아내와 가족들이 함께 달라진 이름의 소원을 갖고 훅욱 불어 촛불을 끄고 함께 케익을 자르며 함박웃음을 웃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지만 너무나 안타까움이 앞서는 것은 자주 겪는 고민이다. 왜 진즉 좀 지금보다 더 빨리 연락을 해서 만날 수는 없었을까? 환자에게 더 좋은 섬김을 통해 지금처럼 우리가 옆에 있음 만으로도 영적인 안정이라도 줄 수가 있었는데... 안타까웠다. 환자들에게 처음 우리가 섬기려 한다고 연락하면 자신들은 지금 죽는 것이 아니라고 거절한다. 그들에게 섬김을 주려하는데 환자들은 우리를 저승사자(?) 쯤으로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20년 년 전,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암 환자들의 사역인 호스피스를 시작하며 그들을 섬길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환자들의 끝없는 신뢰의 러브 콜을 통해 한 밤중이던 새벽이든 잠 잘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그들을 찾아 갔고 쉼을 갖지 못해 몸에 무리가 가서 결국 2~3번 과로로 쓸어졌어도 섬길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환자들을 섬기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호스피스라는 이름이 죽음만을 연상하는 이름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년 전부터 이름을 바꾸자. 이미지를 바꾸어야 한다. 믿음의 이름을 선택하기로 기도했다. 환자들의 입장에서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그래서 이 새해가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름을 바꾸었다. “호스피스.전인치유”라고 썩 마음인 든다. 환자들의 입장에서 잘 표현된 이름이 될 길 원한다. "전인치유"를 강조하는 20년 전 처음 우리가 환자의 영적, 심리적, 육체적, 사회적 회복을 위한 사역으로... 암이나 희귀병 환자들, 사별한 가정들이 우리를 좀더 쉽게 받아들여 그동안 섬겼던 20년의 노하우가 저들에게 “하나님의 생각인 평안과 소망”의 섬김이 되길 소원한다. 오늘 그 형제처럼 너무 늦게 우리의 섬김을 받아들이지 말고, 적절하고 필요한 시간에 그 곳에 달려가 섬김으로 아름다운 회복의 소식을 위해 우리는 이름을 바꾸면서 까지 믿음의 섬김을 소원한다. 아울러 우리 환자나 그 가족들이 다 같이 “믿음의 이름”으로 바꾸어 모두가 행복한 투병을 이루도록 하는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다. 11-3 섬김의 마지막 소원 목사님 아내의 장례 예배에는 제가 보내는 이 성경 본문과 이 찬송으로 해 주세요. 20년이 넘는 동안을 환자 사역을 하며 수많은 장례를 인도했지만 유족들이 장례 예배의 성경 본문을 보내 주고 거기에 맞는 설교를 부탁 받기는 처음이었다. 조금은 당황했지만 유족인 남편의 부탁이니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정해 준 찬송가 내용을 아무리 음미해 봐도 또, 성경을 펴고 본문을 몇 번 읽어 보아도 전혀 장례 그것도 입관 예배에는 적절하지 않은 본문이라 생각했다. 참으로 성격도 이상하다! 아니 예배 인도는 목사인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인데... 찬송은 고인이 좋아한 찬송이라 해도 성경 본문은 좀 심했다는 생각을 갖고 기도하며 준비했다. “하나님 아버지! 이거 어떻게 해야죠? 아무리 믿음이 좋은 남편이라도 왜 이런 일을 해서 저를 이렇게 당황하게 하죠? 아무리 제가 고인 생전에 교회에서 훈련을 했을 때 담당 목사였다 하지만 조금은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요? 저 이 예배를 인도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네요. 제가 꼭 이 본문 아니라 다른 성경 본문으로 바꿔도 되겠지요? 남편이 상처 받지 않게 그 마음을 돌리게 해 주세요!” 기도했지만 그 남편은 그 밤 조금은 늦은 시간에 다시 전화를 해서 자신이 본문을 정해서 마음이 조금은 무겁다고 그리고 미안하다는 확인 차 전화를 했다. 입관 예배를 준비하는 동안 무거운 마음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입관을 준비하는 입관실을 찾아가 입관을 참관하고 3년을 넘게 섬겼던 사랑하는 집사님과 이별을 고하며 관에 누이고 돌아 나올 때 그 남편과 눈이 마주쳤을 때도 알 수 없는 그 무거운 마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아직은 젊은 나이에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아들과 딸을 꼭 안고 슬퍼하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남편의 어깨를 껴안고 위로하고 예배를 위해 함께 조문실로 돌아 왔다. 그런데 그곳에는 너무도 뜻밖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20kg 쌀 봉투가 100포나 쌓여 있는 것이었다. "왠 쌀?" 하며 너무 놀라하는 나를 보고 그 남편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언제나 아내는 투병 중에도 자신보다도 연약한 자를 위해 기도하고 항상 마음을 썼었지요. 언젠가 유언처럼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 돌아가면 혹, 자신을 위해 조문하는 분들의 조위금을 지정한 장애 단체 고아원에 쌀을 기부해 주세요!”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뿐이고, 그것이 아내가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그 성경 본문도 아내가 좋아할 본문이라 생각했다는 말씀을 듣고 나니 성령님께서 그 순간 집사님이 투병하던 시간, 우리와 함께 했던 믿음의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게 하시며, 그 어렵고 힘들었던 온 가슴을 다 절개한 유방암에서 임파로 또, 전신으로 나중에는 뼈, 뇌까지 전이가 되어 통증과 고통 그리고 흐려지는 기억 속에서도 내가 찾아가면 너무나 반겨 주었던 일, 어느 땐 퉁퉁 부은 몸과 얼굴로 인해 눈이 떠지지 않을 지경이었을 때도 우리가 찾아 가면 그렇게 행복해하던 기억들이 바로 이 무언의 찬양들이 이것이었구나! 또, 그렇게 자신의 소아마비로 인한 장애와 딸이 갖고 있는 자폐로 인해 힘든 장애의 어려웠던 현실의 아픔의 고백이 이것이었구나! 생각이 스치는 순간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환자로서의 그 투병 과정이 위대한 승리였다고 확신하며 부담스러웠던 예배가 아닌 너무도 감사한 예배를 인도했다. 그런 아내의 소원을 위해 이런 결단을 한 남편의 그 아름다운 믿음을 보면서 어쩌면 하나님은 마지막까지도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하셨을까? 이 자랑스러운 가정을 보고 있자니 내가 너무나 작게 느껴졌고, 그동안 수많은 예배를 인도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마지막까지 자신의 섬김을 다하는 사랑하는 집사님들, 떠나신 분들이나 남은 자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 많이 욕심스럽게 움켜쥔 부끄럽기 한이 없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우리 곁을 먼저 떠난 사랑하는 집사님은 어릴 때 얻은 천형 같은 장애는 이젠 그에게 두 다리를 통해 자유롭게 활보할 능력을 주셨고, 또 핸섬하고 아주 멋진 남편은 아내를 위해 그 오랫동안 믿음으로 최선의 섬김을 다 한 것을 알기에 충분히 행복하리라 확신했다. 또, 엄마의 그 어려운 투병 중에도 당당히 대학에 합격하고 최선을 다하는 아들과 비록 자폐란 장애를 갖고 살아갈 딸도 엄마 아빠로 인해 얻은 믿음의 삶을 통한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을 위해 확신하기에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11-6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 “처조카가 12살인데 오른쪽 팔의 골육종 치료를 마쳤는데 갑자기 고열이 나고 조금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는데 병원에서는 어쩜 백혈병이 발병한 것 같다고 검사 중 인데 걱정이네요” 아이도 믿음으로 잘 견뎌 왔는데 그동안 치료가 잘 되 이제 한 숨 돌릴까 했는데 다시 재발 가능성을 말하는 부모와 함께 숨죽인 눈물 속에서 여간 낙심이 크지 않다고 했다. 부모님과 아이와 이모, 이모부를 함께 만났다. 아이에게 예수님이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너무도 확실하게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이에요!” 대답하는 이 아이에게 예수님은 네가 고백한 것처럼 너를 치료해 주실 이유를 민수기 14장 28절을 들어 설명해 주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 딸의 백혈병의 가능성에 엄마와 아빠는 아이보다 더욱 낙심하고 있었지만 딸과 함께 하나님 말씀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는 것이 확연해 보였다. 딸은 한 주 후 백혈병 판정을 받고 입원했다. 입원을 하면서 계속 헨드폰으로 엄마는 문자를 통해 상황을 알려 주었고, 이 상황은 나의 기도제목이 되었고, 우리 봉사자들의 기도가 되었다. “서현(가명)이가 넘어야할 큰 산인 항암치료가 앞에 있습니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하나님 허락하소서 이 딸에게 긍휼을 베푸소...” 이렇게 문자를 받고나면 나는 “고전 3:9 하나님은 우리의 동역자이십니다!”로 격려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리에서 일어나 혼자 앉아서 음식을 조금 먹기 시작 했어요 기도 너무 감사합니다. 내일 척수 검사와 항암치료도 이겨내 좋은 결과 있기를 사랑의 주님 의지하여 기도드립니다. 한 고비, 한 고비 고단하고 힘든 길이라도 주님 동행하시고 감사함으로 이겨나가는 서현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새벽부터 서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잘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서현이가 항암 3일째를 잘 견디고 있습니다. 백혈구 수치가 0으로 가고. 있어요 모든 균으로부터 차단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면“잘 감당한다니 감사하네요,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박목사” 더 많은 문자가 오고 가며 아무리 격리 된 병실일지라도 찾아보고 싶었다. 항암을 받고 있고 관해(핏 속에 암세포가 없는 상태)가 된 상태 이지만 우리는 계속 서현이를 위해 기도를 쉬는 일이 없도록 매주 봉사자들에게도 하루하루의 회복을 보고해주었다. 서현이는 그동안 항암의 후휴증으로 입술이 터지고, 식사를 전혀 하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 졌다. 엄마나 아빠는 딸이 고통 받는 것을 보아야 하는 그 아픔을 용케도 잘 이겨냈다. 병원을 찾아간다고 기다리다 조금 안정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른 아이들 때문에 병실에는 들어 갈 수 없기에 격리된 면회실에서 서현이를 기다렸다. 병원에 있는 공부방에서 수업을 하고 있다하여 기다리는 그 시간 참으로 생각이 많았다. 우리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공부해라, 공부해야 한다고 유치원생부터 학원을 보내야 직성이 풀리는 과외 공화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모들이OECD 국가 중 최하위 행복권을 갖고 있는 아이들, 적당히 그 때 밖에 누릴 수 없는 놀며 발달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부모들이 이런 병실을 한번 쯤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아이들이 느껴야 하는 행복과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 것을 알 텐데.... 이 병실에 있는 수많은 아이들을 속히 회복되길 간절히 기다렸다. 갑자기 뒤에서 “목사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현이였다. 벗었던 마스크를 얼른 착용하고 알코올로 좀 전 이 병실을 들어 올 때 소독했던 손을 다시 닦는 나를 발견했다. 혹시나 나로 인해 이 아이에게 다른 감염이 되기를 원하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아직 아물지 않는 고통을 이긴 자의 표식이 얼굴 여기저기에 있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보다 부모도 아이도 활발해져 있음을 확인하고 간절히 기도할 때 “아멘!”하는 목소리에 힘이 있다. 이제 두 달이 지났다. 그리고 다음 달 골수 기증을 위해 헌신한 분의 골수가 서현에게 잘 맞다는 결과가 문자로 왔다. 너무 감사했다. 우리는 모든 다시 소망을 갖는다. 이번 골수 이식을 통해 또 하나의 산을 넘어 평야를 뛰어 달리는 서현이를 보고 싶다. 더 이상 병원에서 고통 받지 않는 또 다른 서현이를 보고 싶다. 11-9 집사람님! 집사람님! “D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인데 환자 한 분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전화를 주신 분은 항상 우리 사역에 관심을 갖고 계셨는데 지금 자신이 주치의로 있는 44살의 대장암에서 많이 전이가 된 환자가 우리의 도움을 받으면 좋을 것 같아서 전화를 주셨다. 병원에 도착했다 했더니, 그 자상하고 친절한 선생님은 뛰어 나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주치의와 함께 일 인실 병실로 들어갔다. 병실은 선생님께서 환자의 집이 강원도 정선이기에 가족들과 함께할 시간이 필요하다하여 편의를 봐 주었다 하셨다. 환자는 침대에 아내는 남편 곁에, 5학년인 딸과 3학년인 아들, 두 아이 외모는 시골에서 다져진 건강함이 넘쳐 보이지만 당황한 눈빛은 깊은 슬픔에 쌓여 아빠의 침대 밑에 외양간처럼 마련한 공간에 떨고 있는 걸 보니 가슴이 먹먹하여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20년 이상을 환자들을 돌아보았지만 이런 환경은 아직도 익숙해지지를 않는다. 환자와 그 가족은 우리와는 종교가 달랐다. 그러나 주치의 선생님의 관심을 통해 그 아내와 환자는 무언가 결심을 했다며 우리를 청하는 것에 동의했다고 했다. 환자와 연결된 봉사자들은 환자가 시골집에 가 보고 싶다하자 그 중 개인택시를 하시는 집사님은 그 날의 영업을 포기하고 강원도 정선 집으로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 또 환자가 필요하다면 그 팀의 봉사자들이 서로 돌아가며 합력해서 정성스럽게 섬겼다. 봉사자들에 대한 신뢰는 환자에게 믿음이 자라게 했고 병상 세례 받고 싶다고 했다. 이 세례는 참으로 감격적이었다. 이 세례는 우리와 환자 가족이 한 가족이 되었고, 환자로 인해 답답하고 고통스러우면 스스럼없이 그 아내는 전화해서 위로도 소망도 나누며 잘 투병해 가다가 7월 20일 소망하던 천국으로 가장 편안함을 갖고 긴 여행을 떠났다. 시집이나 친정의 다른 종교의식에 따른 장례를 주문하자 부인은 단호했다. 남편은 세례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자신들도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훗날 천국에서 만나기 위해서도 교회에서 하는 장례를 하겠다하여 온 가족의 동의를 얻었다. 장례 중 남겨진 아내에게 사별관리 팀에 대해 이야길 했다. 이제 우리 모두가 한 가족이 되었으니 본인만 원한다면 사별관리 팀과 연결하여 같이 지냄이 어떻겠냐고 했다. 남겨진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우리 사별관리 팀에 들어오고 싶다며 또, 8월 8일부터 2박3일하는 “제 20회 사랑의치유캠프”에도 동참하고 싶다고 했다. 장례가 진행될 때 사별 후 2년 미만인 그룹인 “주바라기 팀”을 맡고 있는 권사님과 연결을 하여 장례에도 참여하게 하여 자매를 위로하고, 아이들을 맡고 있는 “사랑의울타리” 팀장 권사님과 연결하여 “사랑의치유캠프”에 함께 참여할 수 있게 연락을 취하도록 했다. 우리가 “사랑의치유캠프”를 떠나는 8월 8일 아침, 37명의 사별가정 엄마들과 아이들 그리고 이들을 섬기는 봉사자 선생님이 한 버스에 올라타고 경주로 출발했다.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 이제 장례를 치룬지 16일 지난 가정이라 소개할 때 모두는 동병상린이 되어 안타까워하면서 더욱 큰 박수로 그 세 식구들을 진심으로 격려하며 정말 잘 왔다며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길 원한다고 축원했다. 서해안 쪽으로는 무이파 폭풍이 다가와 비바람이 쳤지만 그동안 캠프 20회 동안 그리하셨듯이 일기가 나빠 고생을 한 적이 없도록 하나님은 항상 가장 적절한 상황으로 만들어 주셨다. 경주에 도착하여 낮에는 문화 해설가를 만나 유적들을 탐방하고 숙소로 들어오는 저녁에 치유를 위한 시간을 갖는다. 첫 날 밤에는 핑거 포팻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즉흥적이지만 손가락 연극을 통해 지금의 자신의 환경과 아픔들을 이야기 한다. 둘째 날은 그동안 관찰된 아픔들을 회복하기 위한 기도회를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이 기도회 후에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가족으로서 서로 합력하여 이루는 조별 모임을 통해 함께 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돌아오는 날에는 모두가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종교적인 문화가 달랐지만 16일 밖에 되지 않은 가족들은 시간이 갈수록 너무도 잘 적응하여 갔다. 한 날, 가만히 우리들의 호칭을 듣던 3학년 아들이 자신도 이젠 자신이 생겼던지 “집사람님! 집사람님!”하고 누군가를 부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더니 누군가를 부를 때 김 집사님! 박 집사님!하고 부르니 이 아이의 귀에는 “김 집사람님! 박 집사람님!”으로 들렸던 것이다. 한 순간 웃을 수도 있었지만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이 가정과 캠프에 참가한 모든 가정들을 보면서 너무도 감사했다. 우리 캠프에서 원하는 사역의 열매가 이것이다. 서툴지만 적응하며 다 함께 다시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1110 주님!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제는 기억도 희미하지만 2004년 6월쯤인가 교회 근방에 있는 대학 병원에 한 환자를 방문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 병원을 찾았고, 찾아간 곳은 2인실 병실이었다. 부인과 계통의 암 수술을 앞둔 환자는 같은 방에 있는 다른 쪽 환자는 대장암 환자라 했다. 수술할 환자에게 성경말씀을 풀어주며 기도할 때까지도 옆 침대 환자는 인기척이 없었다. 막 병실에서 나오려 할 때 그렇게 꽁꽁 열릴 것 갖지 않던 커튼이 열리며 “목사님!”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자기를 위해서도 기도해 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당연하죠!” 하고 말씀드렸더니 자기에게도 성경 말씀을 달라는 것이다. 그 말씀이 위로가 되었다고 자신도 갑자기 암 환자가 된 것이 어이가 없고 어떻게 마음을 추스르고 투병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했다. 대부분 중한 환자가 되고 나면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자존감도 낮아지고 투병하는 동안 자신감도 떨어져 버린 상태가 된다. 이런 환자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 하면 자신들 만이 갖고 있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높은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하며 투병할 수 있을까를 위해 지지해 주고 섬기고 싶어 한다. 7년이란 시간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보면 유난히도 자신이 암 환자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안했던 환자, 그동안 재발과 전이가 있었어도 그때마다 그 힘든 치료를 특유의 자신감으로 잘 치러냈다. 그리고 가능하면 빨리 100여명의 환자 명단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투병을 시작한지 5년 정도 지나 환자는 완치가 된 것 같다며 얼마나 기뻐했던지... 2년 전 1월 중순, 간에서 무엇인가 보인다고 정기검사 때 그랬다며 기도 부탁을 부탁한다. 그리고 얼마간의 항암과 병원 치료를 통해 흔적만 보인다고 괜찮아졌으니 염려 하지 말라하곤 한동안 환자는 보이지 안했다. 그동안 환자가 생각날 때마다 “잘 계시겠지!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괜찮다고 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마음을 평안으로 다 잡으려고 했다. 항상 그렇듯이 중보기도 실에서 올라온 환자의 명단을 보낸다는 e-메일이 왔다. 난 이 e-메일을 받으면 한 사람, 한 사람 통화를 해서 우리가 투병을 지지하고 섬기길 원하는데 괜찮겠냐? 묻고 좋다고 하면 그 분을 만나 어떻게 우리가 섬길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투병 하실 것인가를 말씀으로 나누고 돌아와 우리 환자 명단의 각 팀에 적절히 배정을 해 드린다. 이번 환자 명단에 그 환자 남편 집사님이 중보기도를 요청한 환자의 이름이 있는 것이다. 가벼운 상태이기를 기대하며 남편 집사님께 전화를 했다. 남편의 목소리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전화를 기다렸다며 약속을 하고 집으로 찾아 갔다. 뼈와 뇌로 전이가 되어 통증이 심해 마취과 의사로 있는 아들이 만들어 주었다며 몰핀이 시간에 맞추어 통증을 제어 할 수 있게 하는 장치를 몸에 차고 계셨고, 그 덕에 통증은 없다고 아들에 대해 자랑삼아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정도로 행복한 표정을 지으신다. 그런데 조금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동안 그렇게 자존감 높은 자신감이 없어졌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는데 다행히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하며 그동안 마음에 떠올리기조차도 힘들었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진해서 하시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내려놓고 그 대신 예수님으로 영원한 생명을 위해 갖게 될 자는 어떠한 투병을 해야 하는가를 말씀드렸다. 먼저 두려움을 벗어 버리기 위해 지금 내 마음과 생각이 얼마나 하나님의 평강으로 함께하시는 가를 확인했다. 조금은 흔들리고 어려워하시더니 그 평강을 위해 자신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이 그 안에 성령으로 부정적인 생각부터 버리자 했다. 거기에 내 말이 하나님 귀에 감사함으로 들리도록 하자하며 하루에 몇 개의 감사를 할까를 찾아보자 했다. 말씀을 끝내고 돌아서는데 집사님이 비틀비틀 일어서기에 자연스럽게 집사님을 가슴으로 안아 주게 되었다. 집사님은 이렇게 안긴다는 것이 “참 평안하네요!”하시는 말씀하심을 듣고 참으로 많이 변했고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준비가 되었구나 싶었다. 어제 밤 12시 31분에 문자가 왔다. 아내가 위급해져 급히 병원으로 왔다고 그래서 3시31분에 남편 집사님께 전화를 했다. 상태를 물어 보고 아침 새벽 예배가 끝나면 찾아 가겠다 약속했는데 예배가 끝나기 전에 7시 31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너무나 평안함으로 떠났다고 전화가 왔다. 준비된 마음에 아름다운 찬국에서 하나님 품에 안겨 내게 평강을 주신 하나님께 “주님! 내 잔이 넘치나이다” 찬송하고 있을 집사님을 바라본다. 1201 조폭였으나 그는 행복한 전도자였다. 한 환자를 만났다. “고아이고 쪽방에서 살기 때문에 집을 방문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언제든지 전화를 주면 만나기 위해 오겠다.” 했다. 50대 초반에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에 순박한 모습과 약간은 느릿느릿한 말솜씨 때문인지 몰라도 그동안 혼자 많이 고생하고 힘들어함이 역력해 보였다. 우리는 형제를 마날 때마다 무엇을 먹었는지, 잠자리는 어떤지를 계속 묻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만남을 하다가도 환자는 가끔씩 한달에 한번씩은 고정적으로 얼마동안은 연락이 두절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달랑 전화 번호 하나뿐이니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되냐고 물어 보면 자기가 목수라 돈을 벌기 위해 지방에 다녀왔다고 미안하다 하나 똑 같이 다음 달에도 소식은 단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말기 환자라는데 온전한 투병만 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없을까도 생각했지만, 자기를 도우려 한다는 것을 알면 강하게 손사래를 쳐가며 자기는 아직 건강하고 자기를 도우려 하는 것은 자기를 무능하게 만드는 것이 다 하니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찬바람이 불던 어느 날은 얼굴이 파랗게 되어 만나려 나왔다, 왜 그러냐 했더니 방에 불을 때지 않고 잠을 자서 그렇다며 이것은 자기를 단련하는 일이라고 했다. 조금은 어이없었지만 집을 방문한다 하면 절대 막무가내 안 된다니 어쩔 수도 없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환자의 행방은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때 까지 오리무중 이었다. 갑자기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도, 어떻게 섬겨야 할지도 도무지 종을 잡지 못하다 그 후 어느 시립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그동안 혼수상태로 연락이 안 되었다 했다.. 여명의 시간이 3개월 미만이란 사실을 알게 된 봉사자가 형제를 위해 인절미를 갖고 찾아갔다. 그런데 그 곳에 여자 동생이 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기는 자신은 고아라고 하지 않했던가? 형제는 실은 시골에 어머님이 계시는데 사정이 있어 말하지 못했노라 말하니 또 한번 어안이 벙벙했다. 기왕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 곳에 가서 생을 마무리 하겠다고 시골로 가고 싶다고 하니 무슨 사정인 줄은 모르지만 형제에게 다시 복음의 능력을 확인하고 시골 길을 배웅했다. 몇 칠 후 전화 한통이 왔다. “형님이 유언하길 기독교식으로 장례 해 달라고 했는데 좀 도와줬으면 해서요!” 전화를 받고 나니 무슨 사연인 줄은 모르지만 꽤나 먼 시골을 내려가 장례를 인도해 준다는 것이 꽤나 막막했다. 그때 같은 지역의 동역자가 생각이 났다. 부탁하고 상가에 전화를 해서 그 지역 목사님이 찾아가 도와 드릴 것이라고 연락처를 알려 주고 동생이라는 분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데 “형님이 나에게도 교회 나가라 해서 교회를 다니려고 합니다!” 하며 전화를 끊는 것이다. 얼마 후 지역에 계시는 목사님이 전화를 했다. “알고 계셨어요? 그 사람이 조폭인 것을...” 그는 중간 보스였다고 말하는데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만 듣는 것이었다. 후배 목사님이 장례식장에 찾아가니 검정 옷을 입은 비슷한 건장한 사람이 일렬로 서 있는데 자기도 깜작 놀랐다면서 자치지종을 말할 때, 아! 그때에야 여러 의문들이 플렸다.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었던 형제, 그 마지막에 그는 한 사람 환자의 투병을 옆에서 보면서 그 자신도 저렇게 행복한 투병을 하고 싶어 우리를 소개 시켜 달라하고 그동안 열심히 듣고 고백했던 예수님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소망대로 이젠 마지막에 의형제들에게 멋진 전도자로 자신의 마지막 삶을 드렸던 것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자신의 과거를 숨기면서 투병했지만 이젠 편안한 웃음을 웃고 있으리. 주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아름다운 찬양 속에서 우리를 만날 그 시간까지 생명을 위한 발걸음 가운데서...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린도전서 15:42~44) 1203 다시 회복의 노래를 시작합시다. “오늘 집사람이 항암 주사를 맞고 집에 왔습니다. 먹는 약도 병행해야 합니다. 항상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하며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집사람이 9차 항암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왔습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내 헨드폰에는 아내의 투병 일지를 보내 온 문자 메세지 수십 개가 저장 되어 있다. 30대 후반의 꿈도 많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치과선생님의 아내가 투병하고 있다. 어느 날 그 남편이 보내온 문자는 울컥하게는 큰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은혜로운 하루입니다. MRI와 PET CT결과 우선 암세포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큰 고비 또 넘게 해 주신 주께 감사드립니다. 남들은 서로 미워해서 헤어지기도 하는데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런 시련이 생겨 너무 가슴이 아파 살짝 주님을 원망도 했고, 누구보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 왔는데, 남 속이거나 울리지도 않고 돈도 벌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생각했는데 성경을 읽다보니 인간은 죄인인지라 주를 믿어야 의로움을 얻음을 깨닫는 중입니다. 매일을 수능을 보는 수험생처럼 불안하지만 잘 견디는 너무 예쁜 우리 *란이가 너무 고맙고 기도해 주시는 모든 분들에게도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넘어야할 수많은 고비 주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아름답고 진솔하게 사랑하는 아내의 투병을 지지하는 남편의 마음 씀씀이를 문자라는 작은 글로 읽고 있노라면 아름다운 사랑의 “뜌앳으로 부르는 노래”을 듣는 것 같다. 처음 환자 집을 방문했을 때 하늘이 전망으로 보이는 28층의 높은 아파트에 살고 계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그렇게 좋을 수 없는 전망이겠지만 환자에게는 뭔가 불편한 전망이었다. 조심스럽게 환자에게는 하늘보다는 땅에 가까운 아래층으로 이사하기를 권했다. 남편은 며칠 지나지 않아 이사를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아내에게 좋은 일이라면 지체할 수 없다며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하여 진심을 축하를 해 주고 이 남편의 사랑이 환자에게 좋은 회복이 되길 소원했다. 한동안 좋은 결과에 감사를 하고, 회복을 확신하며 건강해졌을 때를 위해 준비된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연초에 날라 온 또 하나의 문자는 우리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밀리미터의 크기의 암이 다시 원래 위치에 생겼다고 합니다. 다음 주 수요일부터 항암제를 바꿔 항암치료 할 예정입니다. 교수님께 현명한 선택을 하시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긴박한 기도 요청 속에 감추어진 두려움의 말들,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는 아픔이 몇 자 되지 않는 그 문자 속에서 웅얼웅얼 거리고 있었다. 환자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나 보다. 꿈꾸고 소망하던 회복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지만 마음의 두려움을 풀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치료의 시작이 백혈구의 부족이라는 복병을 통해 치료를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심령의 고통으로 무너져 가고 있었다. “오늘도 주사를 맞지 못하고 돌아 왔어요, 오늘도, 오늘도...” 환자들이 예정된 주사를 맞지 못한다면 찾아오는 그 아픔과 절망을 알기에 몇 번의 주사를 맞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낙심하며 그 큰 눈에 눈물만 가득할 자매를 생각하니 봉사자 권사님이나 내 마음이 너무도 조급해졌다. 아내를 위해서는 어떤 괴로움도 이겨내자고 지지 해 주던 그 남편을 생각하다 갑자기 나는? 이란 질문이 생겼다. 내 아내도 현재 투병 중이다. 그런데 나는 이 자매의 남편처럼 위로나 지지를 해 주어야 한다며 환자 가족들에게 강요(?)하면서 별로 그렇지 못하는 무능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나를 발견하고 오늘부터라도 ...... 마음을 다잡는다. 봉사자 권사님과 자매를 찾아 이사한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자매에게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도 어린 두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소망을 회복하자고 말씀으로 기도로 새롭게 하며, 피아노가 전공인 환자의 반주에 맞추어 함께 찬양을 몇 곡 부른 후에 돌아와 내일 맞을 항암제가 회복의 시작이 되길 기도했다. 다음 날 돌아온 문자는 “오늘 잘 감당했습니다. 감사합니다!”였다. 우린 소망한다. 오늘만 이 아닌 앞으로 계속 회복된 감사를 다시 노래할 그 날을 위해 다시 시작합시다. 1205 20년만의 받는 병상세례 M의원의 원장은 동네 의원을 개원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돌보는 환자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장점을 살려 자신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환자 중에 조금은 어려운 상황에 있는 환자가 있으면 가끔은 전화를 해서 마음에 낙심하고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예수님으로 소망을 심어 주고 잘 투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지를 묻곤 한다. 얼마 전 47세의 형제인데 너무 안 되었다며 그 가정을 소개하며 매일 매일 진통제가 없이는 불가능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며 공기 좋고, 물 좋은 시골로 이사를 한다는데 좀 멀지만 도움을 줄 수 있겠냐는 것이다. 무엇을 지체할 수 있겠는가? 본인의 의사만 좋다면 우리는 괜찮다고 약속을 드렸다. 조금은 늦은 시간에 형제의 아내와 통화를 하면서 환자의 상황을 체크하다가 얼마나 안타깝던지 무어라 위로할 말을 찾기가 쉽지가 않했다. 법무 일을 하셨던 그 형제는 고집도 세고, 자신에 대해 대쪽같은 성품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고통스러움을 가능한 내비치려 하지 않고 현재 자신이 고통스러워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하려 애를 쓰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20년 전에 친척의 권면으로 신앙을 갖었단다. 얼마 후,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려고 준비를 하다가 자신이 아직도 술, 담배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술, 담배를 끊지 못하면서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고 술, 담배를 정리한 후에 다시 세례를 받자 하다가 결국은 교회를 떠나 버렸다는 것이다. 20년을 혼자 힘으로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 보려 했지만, 결국 자신은 위암 4기라는 판정을 받고 더 이상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알았으니 이제라도 세례를 받고 싶다는 것이다. 형제는 왜 예수님으로 자신의 삶을 맡겨야 하는 가를 듣다가 지금껏 본인이 원하던 20년 만에 자신이 자신을 어찌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지금껏 미루던 세례를 병상세례로라도 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20년 만에 받는 세례는 비록 병상에서 드려졌지만 너무나 흥분되는 시간이었고 평안을 찾는 시간이었다. 이제껏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오려 했지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의 십자아래 내려놓고 나니 우리 주님은 그 형제에게 약속하셨던 부활하심으로 이뤄 주신 가벼운 멍애로 대신 바꾸어 주심으로 형제는 감격적인 눈물과 함께 행복해 하는 평안이 그의 얼굴에 역력했다. 형제는 물도 쉽게 삼킬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마른 생라면이 먹고 싶다 해서 주지 않으려 싸웠고, 찬 물만 먹고 싶어 해서 싸웠다 한다고 자매는 나에게 응원을 요청한다. 형제는 자신이 이제는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또, 주위에서는 얼마나 버텨 줄까를 염려하고 있다. 그러기에 본인은 얼마나 더 힘이 들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약속은 받지 못했지만 나이로는 젊음이 있기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복수가 가득한 배로 인해 누워 있는 것도, 호흡하는 것까지도 쉽지가 않다 하지만, 자녀들을 생각하면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는 상황이다. 이제 막 중학 2학년이 된 큰 딸은 아빠가 위암 4기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더 이상 인정하고 싶지 않는 사춘기를 심하게 겪고 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든지 아빠가 아픈 것을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엄마에게 다짐을 받는다.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 딸은 아무렇지 않게 “아빠가 위암이래요!” 하지만 위암이 얼마나 무서운 상태인지 그리고 아빠가 왜 그렇게 아파하는지 잘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지난 달 새로 이사를 온 시골 동네 아이들과 어울림에 더 마음을 쏟고 있을 뿐이다 답답해한다. 젊은 아내이자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다 잡지만 혹시나 남편이 떠나면...“생각만 해도 너무 너무 무서워요!” 하며 애써 참아가며 울먹이는 전화 목소리에 가까이에 있어야지 어떻게 돕기라도 하지 그져 답답하고 아픈 마음에 “주님 제발 도와주세요!” 할 뿐이다. 지금도 응급 상태가 되어 환자가 병원에 갔다기에 지금 당장 가장 가까운 교회에 찾아가 그 곳의 목사님께 부탁하고 도와 달라고 하시라고 권면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오늘도 자녀의 아픈 마음과 두려움을 혼자 감당하라고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고 분명 도움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드렸더니 갑자기 자매의 목소리라 밝아지며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을 한다. 주님은 오늘 이 자매의 아픔 속에서 형제의 가정을 책임지시리라 믿는다. 20년 만에 받은 세례를 통해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아들을 위해 버려두지 않으시는 사랑을 확인하였기에... 1209 지금 참 행복해요 오랜 중보자들의 기도와 20년 호스피스.전인치유 사역의 열매로 사랑의전인치유센타가 지난 6월17일 오후 5:30 그랜드 오픈 예배가 강원도 횡성 치유센타 현장에서 있었다. 주일 오후인데도 많은 승용차와 13대의 대형 버스가 줄을 지어 700여명 이상의 인파들을 쏟아 놓는 것을 볼 때, 지난날 참 많은 감회가 갑자기 주체하기 힘든 감격을 갖게 했다. 그동안 셀 수 도 없는 정말 많은 절망 중에 있는 환자들을 만났다. 약 해질 대로 약해진 그들은 나와의 만남 자체만으로도 소망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저들이 소망을 고백하기 위해 치는 몸부림 앞에 쳐진 현실이란 커튼은 얼마나 그 약한 몸뚱이를 칭칭 감고 있는 것을..., 세상은 저들을 향해 치료 불가능이란 채찍으로 갈가리 연약한 육신을 내리치고 있음을 보았고, 그 많은 학문은 저들을 향해 무조건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죽음을 준비된 것처럼 의연하라고 만 강요했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 하나가 깊숙한 내 마음속에 아직 마주친 눈동자가 되어 남아 있다. 25년 전 처음 암환자를 만나 안수 기도를 하는 중에 그 환자의 훌러덩 벗겨져 버린 가발로 인해 완전한(?) 민둥 머리를 보았고, 한 올도 남아 있지 않던 벗겨진 머리를 한 손으로 쓱 만지며 머쓱해 하며 나를 쳐다보던 그 눈망울 속에 암이란 투병의 삶이, 아픔이 절망의 연속일 수밖에 없음을 기억한다! 저들이 그 절망이란 자리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소망을 얻게 하기 위해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령을 통해 우리와 봉사자들과 함께 투병함으로 평안과 소망을 갖자고 집집을 찾아 다녔지만 현실이라는 아픔의 괘리를 좁히지 못하고 얼마나 충돌을 많이 했던가... 이 추억은 아직도 내 환자 25년 사역 가운데서 낮아지게 하는 도구가 되어 자리 메겨졌다. 그래서 사랑의전인치유센타를 위해 오래 기도하고 준비하고 또 힘과 여러 힘을 모았다. 이 센타에서 지난 한 달 전, 그 소망하던 또 다른 첫 사역인 환자 두 분이 입소를 했다. 두 분은 그동안 식사를 전혀 잘 못하시는 희귀성 질환을 갖고 계시는 공통점이 있었다. 한 분은 병명도 잘 모르는 분이요, 한 분은 다리에 생긴 육종암으로 법정 기준치를 훨씬 넘는 방사선 치료를 받아 만신창이가 되었다. 함께 살아가며 가까이에서 하루 종일 섬기고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도 좋을 수가 없었다. 유기농으로 만든 음식에 그동안 먹지 못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왕성한 식욕을 통해 감사가 터져 나오더니 그렇게 어두웠던 얼굴들이 새벽부터 시작되는 말씀과 함께 투병함을 통해 자존감이 회복되고, 자신감이 회복되어 하루하루가 다르게 보여 지는 저들의 표정 속에 감사를 고백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세 명이 갑자기 부르짖는 통성기도 소리에 너무나 놀라 뜰에서 놀던 강아지가 2층 예배실 까지 달려와 무조건 수분 동안 짖어대는 바람에 웃지도 못하고 그저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되었다. 두 분의 환자는 누구랄 것도 없이 약속된 열흘과 한 주간이 지나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이곳에 올 때는 절망이라는 친구가 자기들과 가장 가까운지 알았는데 “지금은 너무 행복하다”는 고백 속에 우리를 응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소를 발견했다. 고린도후서 13:13에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交通)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오늘도 함께하는 환우들 속에 똑같이 고백하는 “지금은 너무 행복하다”는 고백 속에 회복과 치유를 위해 오늘도 기대해 봅니다. 우리 모든 환우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며 하시는 약속인 “다 이루었다!” 그리고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부활復活) 하셔서 “네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선포하신 그 은혜가. 그 깊은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도 성령을 통해 투병하시는 우리 모든 환우들에게 충만함으로 회복되어 지길 소원한다. 며칠 전, 조선적 교포가 소식을 듣고 찾아 왔다. 함께 온 아이가 엄마와의 떨어짐이 아쉬어 자신의 엄마에게 이곳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길 강요하더니 오늘 그 아들은 이 센타에서 아예 살겠다고 하니 그 조선족 엄마는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며 감사하는데 덩달아 감사는 또 이어간다. 1211 나는 진짜로 행운아예요 낮 동안 세상을 밝힌 피곤함을 붉은 노을은 긴 낙조를 안고 그렇게 해는 서쪽 하늘로 넘어가고 있을 때, 종일 가을의 햇살을 듬뿍 머금은 치유센타 나무의자의 따듯함을 기분 좋게 느끼며 환우들과 마당에서 특별한 나눔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한 자매가 대장암 4기라는 진단을 받고 7개월 동안 병원에 생활을 하다가 끝도 없는 항암의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친구로부터 전해 받은 자연치유라는 책을 읽다 용기를 얻고 별 소득 없이 죽음을 기다리던 고통만 주던 항암대신 이 곳 전인치유센타로 옮겨 오게 되었다며 말문을 연다. 중국 길림성이 고향이며, 국적도 거주지도 중국 청도에 사는 40대 중반의 조선족 동포. “병원에선 더 이상 회복 회복할 수 없다고 치료를 포기하고 나올 때, 자신을 바라보던 의사와 간호사의 안 됐다는 표정을 하며 불쌍하게 바라보던 눈빛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치료를 받으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살아 보고 싶어 병원 근방에 있던 교회에 몇 번 나가 본 것이 믿음이랄 것도 없지만 신앙생활의 시작의 전부였습니다. 또, 사형선고를 받고 사는 것 같은 삶의 하루하루는 슬픔과 고통과 눈물의 시간이었지만, 이곳에 와서 우리와 함께한 시간은 처음으로 행복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 같다”고 감사의 말문을 연다. 그녀는 남남북녀라 했던가, 아름다운 미모와 남편과 함께 사업을 해서 그런지 시원시원한 성격과 고운 목소리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상당한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그에게 찾아온 질병의 그늘은 자신이 누렸던 삶의 모든 것을 두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고, 모든 지금까지의 자신의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포기되어져 갈 때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의 시간뿐이었단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살려 주시기 위해 한국 땅으로 보내시고, 몇 사람 친구들의 소개와 소개를 통해 이곳까지 우여곡절을 통해 인도해 주시더니 지금은 자신을 만나 주셨다며 매일 매일이 이렇게 감사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꿈만 같다고 고백을 한다. 아침저녁 예배를 인도하는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자매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을 때 당황함을 잊을 수 없다. 한참 말씀을 전하는데 갑자기 자매의 얼굴이 일그러져 통증을 느끼나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조금 후 흘러내리는 눈물을 바라보며 통증이 아닌 성령을 통해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과 소망의 감격이란 표정을 읽고 나서야 안도를 했었다. 자매는 찬송을 해도 처음 불러본 찬송일인데도 곧잘 따라 부르며 자신이 지금껏 알고 불렀던 어떤 노래보다 아름답다며 특별히 가사가 너무나 아름답다고 감격해한다. 성경말씀과 찬송의 가사는 자매에게 기도가 되고 그 기도는 바로바로 응답이 되어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기쁨이 되고 있다. 병을 진단받고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실패한 것 같고 무능한 것 같은 자신의 무기력함으로 인해 슬프고 불편한 심기였는데 이곳에서는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유하고 있으니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가 절로 흥이 난다는 것이다. 감히 생각지도 못한 하루에 거의 10km의 산책은 자신의 몸이 풍선이 된 듯 날아갈 것 같은 착각의 시간을 갖게 된다며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을 이렇게 감사할 수 있게 했다” 고백하며 자신이 배운 “예수 예수 오직 예수님뿐”이란 찬송을 흥얼댄다. 자신은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동안 하루에도 수십번 오늘 자신과 함께 하심에 감사하다 보니 정말로 주님과 동행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이 암이란 병에 걸려들어 이곳 센타에 온 것이 오히려 “나는 진짜 행운아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집안 식구들을 떨어져 있는 곳, 그것도 외국에 와서 얼마나 불편할까를 생각하는 나에게 자매는 우리를 만나 예수님을 알게 되고, 복음의 은혜로 투병할 수 있어 자신이 “진짜 행운아!” 라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소명을 다사 한번 회복하게 된다. 자매를 괴롭혔던 간에 있었던 그렇게 컸던 암세포도 지금은 전혀 잡혀지지 않고, 대장도 문제없고 식사나 운동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한다. 지금도 음악치료에서 배운 오카리라를 연습 삼아 불어 대고 있다. 얼마 후 자신이 멋지게 찬송을 연주하고 싶다며... |